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그때 오늘] 이승만 망명 33년 만에 귀국, 좌우 모두 환영 성명

1947년 4월 미국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이승만(오른쪽에서 둘째). 중국에 있던 이청천 장군(가운데 꽃다발을 든 사람)과 귀로에 동행했으며, 비행장에는 김구 주석·김규식 과도입법의원 의장이 영접을 나갔다. [건국대통령이승만기념사업회 제공]
1945년 10월 16일 오후 5시 김포비행장을 통해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였다. 1912년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33년만의 귀국이었다. 한국인들에게 독립협회부터 활동을 시작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했던 이승만의 귀국은 희망의 메시지였다. 보수정당인 한국민주당뿐만 아니라 조선공산당에서도 귀국을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귀국 다음 날 이승만은 미군정의 하지 중장, 아널드 소장과 함께 군정청(지금은 철거된 옛 총독부·중앙청 건물) 제1회의실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싸우겠다는 요지의 기자회견을 했다. 회견에서 이승만은 귀국 직전 일본 도쿄에서 맥아더와 하지 장군을 만났던 사실을 언급했다. 또 임시정부의 대표가 아니라 ‘평민 자격’으로 귀국했음을 강조했다. 이는 미군정이 군정청 외에 다른 어떤 조직도 정부로서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사실과 관련된다. 이승만의 이러한 태도는 귀국 이후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속 주장함으로써 미군정과 대립했던 김구와 대조되었다.

당시 미군정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조선공산당이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미군정이 통치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보수 세력이 대중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했고, 이승만의 귀국을 요청하고 그를 지지한 것은 보수적 정치세력의 단결을 위한 것이었다. 미군정은 10월 20일의 연합군환영대회에서 이승만을 애국자로 소개함으로써 그에 대한 지지 입장을 적극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군정의 정책에 협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정회한 뒤 단독정부 수립 가능성을 천명한 정읍 발언으로 인해 미군정과 불화를 겪었다.

결국 이승만은 46년 말 정치적 결단을 내렸다. 그는 워싱턴을 방문, 미국 정계 및 군부 요인들을 만나 로비를 벌임으로써 미군정이 좌우합작위원회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고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을 선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38선 이남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졌다. 그는 통일국가수립을 가로막은 ‘분단의 원인제공자’였는가. 아니면 자본주의 체제의 궁극적 승리를 예견했던 ‘건국의 아버지’였는가. 아니면 정치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정치 9단’이었는가.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