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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문화유산과 스토리텔링의 만남

영월에 위치한 장릉은 한양 백 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능 조성 원칙에서 벗어난 것은 물론이고 병풍석·난간석이 없는 데다 석물 또한 단출하다. 봉분이 지나치게 높은 곳에 위치하고 정자각과의 방향도 달라 참배객이 능의 옆구리를 향해 절해야 한다. 접근성이나 볼거리는 물론 형식 또한 옹색하니 장릉은 조선 왕릉을 대표하는 존재라곤 볼 수 없다. 그런 장릉이 세계유산 등재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한다. 유네스코 실사단이 한국에 왔을 때 장릉에 얽힌 단종의 애절한 이야기를 듣고 감동했고 비로소 조선 왕릉에 주목했다는 것이다.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죽임을 당해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충신 엄흥도가 수습하여 묻은 장소에 봉분이 만들어진 애절한 이야기가 영월이라는 외진 장소, 봉분의 궁벽함, 소박함 그 모든 단점들과 연결되어 전설의 애틋함을 전경화시키는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재조직된 것이다. ‘재수없게’ 내리는 구질구질한 비조차 단종의 눈물이 되니 ‘때맞춰’ 옷깃을 적시는 슬픔에 어떤 관광객이 감탄하지 않겠는가.

영생을 꿈꾸는 절대 권력자의 끝없는 욕망이 만들어낸 진시황릉이나 피라미드 이야기와는 차별화되는 장릉 이야기의 요체는 바로 한국적 사랑인 ‘정(情)’이다. 언제 본 왕이라고,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죽은 영혼이 서러워 그토록 극진히 모신 영월 사람들의 정이 완만한 한국의 산을 닮은 봉분만큼이나 그윽하고 질기다. 고운님 여의옵고 냇물 흐르는 소리를 눈물로 들었던 왕방연이나 아내 송비(宋妃)를 돕기 위해 채소시장을 열었던 민초들의 사연은 또 얼마나 은근하면서도 깊은 속정인가.

한국의 정은 완만한 구릉과 굽이굽이 도는 강물만큼이나 국토의 장소성과 닮아 있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있는 왕릉의 보편성, 그리고 정(情)이라는 한국적 특수성의 절묘한 조화가 장릉 스토리텔링의 정체다. 장소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수천 년 세월 동안 사람들이 살아온 자취와 숨결이 녹아 켜켜이 쌓인 역사의 혼(魂)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사람이 자연을 닮고 어느새 자연이 사람을 닮아버린 그 결정체가 바로 그 장소의 이야기이고 우리 문화유산이 세계를 감동시키게 하는 원동력이며 국가의 브랜드 가치가 된다.

이제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우리 문화유산에 혼을 불어넣어 깨어나게 해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장소의 혼을 불러오는 주술사가 필요하다. 구체적인 물질·질료에 깃든 상상력을 깨어나게 하는 이야기꾼이 우리가 거주하는 한국을 추상적인 위치 이상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다행히 그런 움직임이 일고 있는 듯하여 위안이 된다. 문화재청이 오는 11월 여수에서 문화유산 스토리텔링 페스티벌을 연다. 여수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인 진남관, 그리고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이순신과 거북선, 전라좌수영 민초들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으로 재구성한단다. 11월엔 나도 난생처음 여수를 한번 가볼까 한다.

최혜실 경희대 교수·국어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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