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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칼럼] 한·중·일의 그랜드 바긴 동상이몽

한·중·일 3국 정상들이 만나 동북아의 지역 현안과 중·장기적인 비전을 논의하는 회의는 그것 자체로도 의미심장한 외교적 장관(스펙터클)이다. 한·중·일 정상회의는 1999년 김대중·주룽지·오부치의 첫 정상회의 이후 10년 동안 상징성과 실질적인 역할을 키워왔다. 지난 10일의 베이징 3국 정상회의는 두 가지 이유에서 큰 주목을 끌었다. 첫째는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으로 핵 협상이 결렬된 가운데 국제사회의 대북 경제 제재가 진행 중이라는 시기 때문이다. 둘째는 회의 직전에 중국 총리 원자바오가 평양에서 김정일과 만나 핵 협상과 남북, 북·미, 북·일 관계에 대한 김정일의 입장을 직접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국과 일본에는 가장 최신의 신뢰할 만한 정보다.

북한은 여름부터 한국과 미국에 평화공세를 취해왔다. 북한의 갑작스러운 미소작전은 한반도 밖으로는 대북 제재의 그물망에 작은 숨구멍이라도 뚫어보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 한반도 안에선 한국에 금강산과 개성 사건으로 중단된 대북 지원을 재개할 명분을 만들어 주려는 계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의도가 어떤 것이든 북한의 그런 화해 제스처는 중단된 핵 협상에 국면 전환의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이런 배경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북핵에 관한 그랜드 바긴이라는 야심작을 들고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 가기 전 하토야마 일본 총리를 만나 그랜드 바긴에 대한 이해와 지지도 구했다. 그래서 베이징 3국 정상회의에서 이 대통령의 그랜드 바긴이 어떤 대접을 받을 것인지, 중국과 일본의 총리가 전 세계의 이목을 받는 공개석상에서 그랜드 바긴에 대해 뭐라고 말할 것인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베이징 한·중·일 정상회의에서 그랜드 바긴은 비중 있게 논의된 흔적이 없다. 원자바오는 아직도 김정일과의 대화 분위기에 젖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남북한, 북·미, 북·일 관계를 개선하고 싶다는 김정일의 메시지를 중언부언 강조하면서 지금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는 기회를 놓치면 그런 기회가 증발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원자바오가 “이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더 큰 정력이 필요해질 것임을 인식하고 파악하기 바란다”는 표현을 쓴 것은 김정일의 메시지 전달 수준을 넘어서 최후통첩의 녹음중계 같은 인상을 남겼다.

정상회의를 마무리하는 공동성명의 어디에도, 3국 정상들의 기자회견 어느 대목에도 그랜드 바긴에 대한 중국 총리의 지지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언급도 없었다. 그랜드 바긴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하토야마는 공동 기자회견에서 이 대통령이 핵 폐기와 탄도미사일과 일본인 납치 문제를 “모두 포괄적으로” 해결하는 그랜드 바긴이라는 표현으로 제창했다고 말했다. 그런 말은 그랜드 바긴에 대한 지지에 많이 못 미친다. 하토야마는 예상대로 다시 차리려는 북핵 협상의 밥상에 납치 문제라는 일본 요리를 한 접시 올려놓았다. 그는 북핵 협상에서 일본을 직접 위협하는 북한의 탄도미사일과 일본인 납치 문제의 ‘시민권’ 확보에 중점을 뒀다. 그랜드 바긴에 과연 일본인 납치 문제가 들어가는지 청와대에 묻고 싶다. 북한을 6자회담에 참석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핵 포기에 합의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강조한 이 대통령의 정당한 주장은 6자회담 재개에 큰 의미를 두는 중국의 입장과 거리가 있다.

세 정상들의 유일한 합의는 한반도 비핵화를 대화와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지극히 원론적인 이 ‘합의’의 속을 들여다보면 심각한 구멍이 발견된다.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할 이슈가 우리의 목표인 북한의 비핵화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 실현’으로 돼 있다. 지금의 북핵 협상을 한반도의 비핵화, 구체적으로는 미국의 핵우산을 포함한 핵 군축협상으로 변질시키려는 것이 바로 북한의 의도가 아닌가. 여기에는 핵무기를 가진 북한을 기정사실로 만든다는 무서운 전제가 어른거린다.

어떻게 할 것인가. 북한은 그랜드 바긴을 허황된 꿈이라고 일축한다. 미국은 어정쩡한 태도다. 그랜드 바긴의 뼈대라도 살리려면 북한이 핵을 폐기하면 경제 지원과 체제 보장으로 보상한다는 선 폐기론을, 핵 폐기 이행과 보상 제공을 동시에 한다는 병행론으로 수정한 ‘그랜드 바긴2’를 내야 한다. 핵 협상의 어느 단계에 남북관계를 전면 개선할 것인가라는, 핵 협상과 남북관계 개선의 관계에 대한 확실한 입장정리도 필요하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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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