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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역저 『조선사』 스스로 폐기한 ‘일본의 양심’ 하타다

1977년 서울에서 사학자 이기백과 함께 한 하타다 다카시(오른쪽). 이기백은 학자가 당시의 연구수준 때문에 본인의 의도와 어긋나는 내용을 쓰게 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라며 조선사 절판 결정을 양심적인 학자만이 할 수 있는 일로 높이 평가했다(고길희 하타다 다카시지식산업사).
하타다 다카시(旗田巍·1908~1994)는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마산소학교와 부산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7년간 이 땅에서 ‘식민자의 아들’로 특권을 누리며 자랐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으면 조선인의 밝고 당당한 모습이 떠오르질 않는다. 살아가는 기쁨,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을 텐데,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조선 사람들은 왜 어둡고 가난에 찌든 삶을 살아야 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은 방관자였다. 구마모토 제5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대 동양사학과를 나온 그는 1940년부터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조사부원으로 8년간 중국에서 살았다. 그때 그는 일본은 문명, 조선·중국은 야만이라는 차별 의식을 갖고 침략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는 길을 선택한 일본 제국주의의 추종자였다.

48년 12월 일본에 돌아온 그는 50년 6·25 전쟁을 계기로 자신에게 ‘청산해야만 할 빚’이 있음을 자각했다. “조선전쟁이 일어나고 있었음에도 조선 문제를 진심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조선인에 대한 우월감과 멸시감은 예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한 상황을 보고 조선사 연구의 필요를 통감했다.” 51년 그는 『조선사』를 펴내 패전 이후 일본의 새로운 한국사 연구를 개척한 선구자로 우뚝 섰다. 이 책은 일본인 연구자들에게 감동과 충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헌책방이나 도서관을 다녀 보아도 낡은 황국사관과 식민지사관에 따른 책밖에 없었던’ 이 땅 지식인들의 타는 목마름도 달래주었다.

“나로서 마음에 걸렸던 것은 자세나 평가를 개선해 가면서도 사실 인식에서 주로 패전 이전의 연구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체성론을 벗어나지 못했던 점, 고대 일본의 조선 지배를 그대로 인정한 점, 조선인의 문화적 창조력을 그려내지 못한 점 등 커다란 결함이 있었다.” 한국사에 대한 새로운 연구 성과가 축적된 1970년대 그는 “스스로도 읽는 것이 고통스럽고 사회를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조선사』의 절판을 결행했다. “우리 일본인은 과거·현재·미래에 걸친 일본의 식민지주의를 스스로 부정하지 않으면 자유로운 인간이 될 수 없다. 한·일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실은 일본인의 성장 지표라 할 수 있다.” 40년 전인 1969년 이미 그는 일본이라는 국가만이 아닌 시민사회가 식민지 지배와 침략의 과거사를 성찰해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제시한 ‘일본의 양심’이었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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