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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의 시시각각] 핵무기보다 강한 동상

서울 중심부에 거대한 단풍 하나가 내려 앉았다. 세종대왕 동상이다. 동상의 영롱한 색이 가을 햇빛 아래 빛나고 있다. 충무공의 검푸른 동상이 남해 피바다의 깊은 물을 상징한다면, 세종의 은은한 동색(銅色)은 성군(聖君)과 백성의 노래가 어우러졌던 가을 들녘을 그리는 것 같다. 이제서야 세종과 충무공이 국민의 손길 안에 들어왔다. 무릇 동상이란 이처럼 사람들이 가까이서 만지고 쳐다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멋있는 동상은 민족의 역사를 웅변하고 국가의 품격을 높여주며 국민의 자부심을 키운다. 특히 영웅의 동상은 좌우·빈부를 아우르며 사회를 더 뭉치게 할 수 있다. 세종이나 이순신 앞에선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다 똑 같은 정당이요, 국민행동본부나 촛불연대나 다 똑 같은 시민세력이다. 그래서 위대한 동상 하나가 수십 년, 수백 년을 버텨내면 그 국가정신의 응집력은 거대한 군사력 못지않은 것이다. 워싱턴의 링컨 석상은 대륙간 핵 미사일 100기보다 힘세고, 런던의 넬슨 제독 동상은 항공모함 100척보다 강력하다. 서울의 세종과 이순신 동상도 북한의 핵폭탄보다 강할 수 있다.

유럽이 제1차 세계대전의 태풍권으로 들어가던 1914년, 미국인은 워싱턴의 중심거리에 링컨 기념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미국은 많은 피를 흘려 영국으로부터 국가를 지켰고, 더 많은 피를 흘려 분열로부터 나라를 지켜냈다. 유럽이 전화(戰火)에 휩싸이는 걸 보면서 미국은 영혼의 리더이자 수호신이 필요하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그 절박한 갈구가 만들어낸 상징물이 링컨기념관이다. 링컨은 기념관 안에 석상으로 다시 태어났다. 석공들은 조지아 주에서 생산된 대리석을 깎고 다듬었다. 높이는 5.8m로 세종상보다 0.4m 낮지만 석상이어서 무게(170t)는 여덟 배 반이다. 미국인은 석상을 표현할 때 로마 콜로세움(Colosseum)과 어원이 비슷한 ‘colossal(거대한)’을 앞에 붙인다.

링컨은 멀리 의사당을 마주본다. 미국인은 링컨이 의사당을 감시하면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 준다고 믿는다. 바로 이 석상 아래서 미국의 역사가 통합과 화해로 전진했다. 1963년 흑인운동 지도자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석상 앞에서 유명한 ‘I have a dream(내겐 꿈이 있다)’ 연설을 남겼다.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취임축하 행사를 가진 곳도 여기다. 노예해방을 주도했던 링컨의 석상은 두 사람의 연설을 위한 완벽한 무대장치였던 것이다. 미국인은 석상을 보면서 어떤 압제와 무력으로도 누를 수 없는 미국의 정신을 느낀다.

문(文)의 위인 세종대왕이 드디어 무(武)의 영웅 이순신 장군과 나란히 서고 앉았다. 두 사람은 함께 국가정신의 효과적인 수호자가 될 것이다. 세종은 강원도에 대기근(大饑饉)이 발생하자 자식(대군·大君)들이 소유하던 토지를 나눠주었다. 대통령의 형제나 아들이 청와대를 드나들면서 이런 세종의 눈을 쳐다본다면 감히 비리를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세종은 “노비도 하늘이 내린 백성”이라며 100일간의 출산휴가를 주도록 했다. 이런 세종을 보면서 대통령이나 여야 지도자는 왜 가난하고 힘없는 국민을 구제해야 하는지 느낄 것이다. 세종은 주요 국정을 신하와 의논했다. 나라의 조직을 맡은 이들은 동상을 보면서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세종은 “백성의 하늘은 곧 밥”이라 했다. 동상을 쳐다보면서 기업인은 제품을 생산하고 일자리를 만드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지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펜이 검보다 강하듯 동상은 어떤 무기보다 강할 수 있다. 세종이나 충무공뿐만이 아니다. 안중근·이승만·김구·박정희도 보다 번듯한 동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영웅들의 동상이 늘어나는 만큼 한국 사회는 강력한 정신적 무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동상이 없는 곳에 분열이 있고 동상이 서는 자리에 통합으로 가는 발걸음이 있다.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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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