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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를 지배한 세련된 부드러움, 젊은 그들은 달랐다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가능성을 보여준 한국 청소년 축구 대표팀. 가나와의 경기에서 박희성이 1-2로 추격하는 골을 터뜨리자 문기한·김민우·서정진·홍정호(왼쪽부터)가 빠르게 경기를 재개하기 위해 공을 집어들고 하프라인으로 달려가고 있다. [수에즈(이집트) AP=연합뉴스]
한국 축구 20세 이하 대표팀이 10일(한국시간) 새벽 이집트 수에즈 무바라크 스타디움에서 끝난 가나와의 8강전에서 2-3으로 졌다. 1983년 멕시코대회 이후 26년 만에 4강 신화를 재현하려던 꿈은 물거품이 됐다. 그러나 한국의 젊은 축구는 실망보다 기대, 좌절보다 가능성을 남겼기에 패배의 충격은 크지 않다. 선수들이 흘린 눈물은 멀지 않은 장래에 환호로 바뀔 것이다.

경기 내용은 나쁘지 않았다. 높은 볼 점유율을 바탕으로 경기를 지배했고 많은 기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너무 이른 시간에 첫 실점을 한 점이 아쉬웠다. 한국은 전반 8분 가나 스트라이커 도미니크 아디야에게 선제골, 28분 랜스포드 오세이에게 추가골을 내줘 0-2로 끌려갔다. 31분 박희성이 한 골을 만회했지만 후반 33분 아디야에게 결승골을 내줬다. 홍정호가 걷어낸 공을 상대 공격수에게 차단당한 게 뼈아팠다. 한국은 교체 투입된 김동섭이 후반 37분 헤딩으로 골을 넣어 2-3으로 따라붙었으나 승부를 뒤집지 못했다.

경기가 끝난 후 나이 어린 선수들은 그대로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굵은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열렬한 응원전을 펼친 교민들은 “괜찮아, 괜찮아”를 연호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짙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이번에도 청소년 대표팀은 26년 전처럼 한국 축구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는 신호탄을 쏘았다.

1983년 한국 축구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을 달리고 있었다. 54년 스위스 월드컵 본선에 처녀 출전한 이후 82년 스페인 월드컵까지 무려 28년 동안 아시아라는 좁은 무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박종환 감독이 지휘한 멕시코 청소년 선수권의 4강 신화는 암흑을 밝힌 한 줄기 빛이었다. 벌떼처럼 빠르고 산소가 희박한 멕시코 고지대에서도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자랑한 한국 축구를 향해 세계 축구는 ‘붉은 악령’이라는 닉네임을 달아줬다. 청소년들의 활약에 이어 성인 대표팀은 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에 출전하는 쾌거를 이어갔다.

‘호랑이 감독’ 박종환과 대조적
1983년 한국은 1번부터 6번까지 번호를 붙인 전술을 장기 합숙을 통해 익혔다. 컨베이어 벨트 앞의 노동자처럼 ‘붉은 악령’은 기계처럼 움직였다. 멕시코 신화의 주역인 신연호 단국대 감독은 “뻔한 전술이지만 속도가 워낙 빠르고 숙련도가 높아 상대는 알면서도 당했다”고 회고했다.

가나와의 경기에서 한국은 볼 점유율 64-36으로 앞섰다. 90분 중 60분 이상 한국이 경기를 지배했다는 의미다. 한국은 3-0으로 완승한 미국·파라과이와의 경기는 물론 1-1로 비긴 독일과의 경기에서도 볼 점유율 58-42로 우세한 경기를 했다. 카메룬과의 조별 리그 첫 경기는 0-2로 졌지만 볼 점유율은 50-50으로 팽팽했다. 한국은 완급과 강약을 조절하는 미드필드 플레이를 펼치며 26년 전과는 다른 호흡으로 경기를 운영했다.

한국은 카메룬에 진 다음 독일과의 예선 두 번째 경기에서 주전 5명을 바꿨다. 김민우도 벤치를 지키다가 이때부터 발탁돼 3골을 터뜨리며 이번 대회 가장 각광받는 스타가 됐다. 예전처럼 기계적이고 도식적으로 팀을 조련했다면 상황에 따른 유연한 전술 변화도, 김민우 같은 스타의 탄생도 불가능했다. 신연호 감독은 “경기 운영과 선수 개개인의 테크닉이 우리 때보다 훨씬 세련됐다”고 평가했다.

박종환 감독은 ‘호랑이 감독’의 대명사였다. 그가 얼마나 혹독하게 선수를 다루었는가는 축구계에 소문이 자자하지만 비판보다는 칭송을 받았다. 박종환식 조련법은 알게 모르게 한국 축구 지도자의 전형으로 자리매김했다. 신 감독은 “감독님이 ‘이 놈들’하면서 호통치면 꼼짝도 못했다. 너무 무서워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며 껄껄 웃었다.

대표팀 주무가 “홍명보 감독은 선수들에게 경어를 쓴다”고 했을 때 기자는 처음엔 믿지 않았다. 한국 팀에서? 그것도 전쟁 같은 축구를 하면서? 도리어 팀 분위기가 민망해지지 않을까? ‘도대체 정확히 어떤 식으로 존댓말을 쓰는 거냐’고 자세히 물었다. 주무는 “선수들을 여러분이라고 부르고, 말 끝은 ‘요’자로 끝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홍 감독은 “상대를 존중하는 만큼 상대도 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존댓말을 쓰는 이유를 설명했다.

아직도 한국의 스포츠 지도자 가운데는 경기 중 선수들이 조금만 실수를 해도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얼마 전에는 배구 대표팀에서 코치가 선수를 구타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홍명보 감독의 청소년 대표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훈련법도 26년 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멕시코 대회 당시의 청소년 대표팀은 아침에 일어나면 태릉선수촌 400m 트랙을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봤다면 깜짝 놀랄 일이지만, 그땐 땀을 흘린 만큼 성과를 올릴 것이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이번 대표팀은 일본인 피지컬 트레이너를 고용해 체력 강화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히딩크 감독이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실시한 것과 유사한 훈련이었다.

올림픽·월드컵의 가능성 높여줘
홍명보 감독은 청소년 대표팀을 연계해 올림픽 대표팀 사령탑까지 맡기로 돼 있다. 이번 대회를 통해 그는 ‘스타는 명장이 되기 힘들다’는 속설을 깨뜨릴 만한 자질을 보여줬다. 그는 한국 축구에서는 보기 드물게 오랫동안 ‘공들여 기른’ 지도자 재목이다. 선수로서는 2002년 월드컵 4강의 주역 중 한 명이며 일본과 미국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는 청소년팀에서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지만 프로 리그 같은 험한 무대에서 능력을 입증한 경험이 없다는 한계를 지적받기도 한다. 이 한계는 곧 한국 축구의 한계로 연결될 수 있다.

한 나라의 총체적인 축구 역량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무대는 성인 월드컵이다. 이번 대회에서도 잉글랜드·독일 등 강호들은 빅리그에 몸담고 있는 유능한 선수들을 제외한 채 대회에 임했다. 이런 이유로 청소년들이 출전하는 대회에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팀이 때때로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월드컵에서는 남미와 유럽 이외의 팀이 우승컵을 치켜들지는 못했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올림픽 출전 연령을 21세 이하로 재조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현행 체제(23세 이하 선수+연령 초과 선수 3명 출전)가 유지되면 이번 청소년 대표팀이 2012년 런던 올림픽의 주축이 된다. 성장기에 놓인 선수들이기에 하루가 다르게 기량이 발전하는 시기다. 2년 뒤 김민우(연세대)·김보경(홍익대)·홍정호(조선대) 등 한국 선수들이 다른 팀 선수들보다 더 가파르게 성장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가나는 21명의 대표 선수 중 8명이 유럽 무대를 누비고 있다. 나머지 선수도 모두 프로 선수다. 반면 한국의 해외파는 4명뿐이고 그나마 모두 일본 J-리그에서 뛰고 있다. 대학에 머물고 있는 선수가 8명이나 된다. 국내 프로축구 역시 1983년 출범했지만 여전히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축구를 경험하기가 어려운 조건 속에 있다. 가나와의 경기에서 가장 위협적인 부분은 놀랄 만한 기량을 가진 두 명의 스트라이커였다. 이런 선수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축구의 저변을 넓고 튼튼하게 가꿔야 한다.

홍 감독은 “감독을 오래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했다. 월드컵에서 16강 이상의 성적을 낸 다음 “축구에 또 다른 형태로 공헌하고 싶다”는 것이다. 홍 감독이 목표대로 월드컵으로 가기 위해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메달권에 들어야 한다. 청소년 대회 8강이라는 성공의 신호탄을 올림픽과 월드컵에서 축포로 연결시킬 수 있을까. 쉬운 일이 아니지만 ‘젊은 호랑이’들과 홍 감독은 가능성을 증명했다.

이해준 기자 hjlee7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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