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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알면 중진국, '남'을 알아야 선진국이다

후나인 이븐 이스하크(808~873)는 그리스 고전을 번역한 아라비아 학자다. 그는 번역료를 번역한 분량의 종이 무게에 해당 하는 황금으로 받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그는 번역할 때 두꺼운 종이를 사용했다. 그만큼 이슬람 문명에 고대 그리스 문명의 성과를 번역을 매개로 흡수하는 것은 중대한 문제였다.

문명이 부흥할 때에는 항상 번역이 중시됐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천문학자·수학자·신비주의자인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1548~1600)는 “모든 과학 분야는 번역으로부터 그 자식을 얻었다”고 말했다. 18세기 유럽은 번역가가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도덕적 의무를 지고 있는 ‘예술가’라고 봤다. 19세기 유럽에선 번역가가 ‘창조적 천재’로 이해됐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학술계에서는 번역이 일종의 청산해야 할 왜색 문화로 취급되기도 했다. 지금도 동서양 고전을 번역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은 수적으로 많지 않다. 일당백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필요한 만큼의 고급 번역 전문가군을 형성하는 것도 숙제다. 열악한 현실 속엔 자비로 고전 번역물을 출판하는 사례도 있다. 학계에선 번역이 연구 성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나도 모르면 후진국, 나는 알면 중진국, 남도 알면 선진국”이라는 말이 있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우리는 오늘의 나와 남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안다. 한국학과 지역학이 급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나와 남’뿐만 아니라 ‘과거의 나와 남’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현재의 나와 남’은 ‘과거의 나와 남’의 연장 선상에 있기 때문이며 ‘과거의 나와 남’에 ‘오늘의 나와 남’의 핵심과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동서양 고전 번역의 문제가 제기된다. 한문으로 된 우리 고전이나 동서양 고전의 번역은 아직 갈 길이 아득하기만 하다. 우리가 따라잡고자 하는 미국·영국·일본·프랑스·독일 등은 거의 모든 동서양 고전을 수십 년 전에 번역했다. 우리는 이미 번역된 고전을 세는 게 더 빠르다. 이미 번역한 동서양 고전도 오역(誤譯)·중역(重譯)·비문(非文)의 문제가 있어 다시 번역해야 할 고전이 태반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어 차라리 사전을 뒤적이며 원문을 이해하는 게 편한 경우도 많다.

동서양 고전을 번역하고 읽는 것은 일종의 사치처럼 느낄 수도 있다. 자연과학, 공학에 대한 투자가 더 시급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번역과 국가·문명의 부흥 사이에는 분명한 인과관계가 있다. 국력 신장의 결과로 번역 사업이 사치처럼 추진되는 게 아니라 번역이 국력을 신장시킨다.

물론 국가의 수준이 올라가면 세계의 고전을 모두 번역·출판했다는 과시도 필요하다. 그러나 역사에 나타난 인과관계는 번역이 독립변수요, 부흥이 종속변수였다. 중국·이슬람·서유럽·일본이 문명 차원의 발돋움을 했을 때 그 이면에는 왕성한 번역 사업이 있었다.

메이지 시대에 일본이 번역을 중심적인 과제로 삼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은 번역을 서구 문명을 흡수하는 수단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근대 일본어를 재구성하고 향상시키는 촉매제로 인식했다. 일본은 번역 수준이 세계 최고다. 우리 바로 옆에 있는 일본을 비롯해 우리가 경쟁할 나라들은 모두 번역 강국이다. 경제력의 기초는 번역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번역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국가적 지원이 절실하다. 동서양 고전은 팔리는 책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가 번역 사업을 지원하는 방안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한국연구재단의 ‘명저번역지원사업’ 등 기존의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우석대 박상익 교수는 ‘동서양고전번역원’의 설립을 제안한다. 동양철학자 김용옥은 동서양 고전의 번역을 관장할 ‘번역청’의 설립을 주창한다.

번역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강화되면 번역이 하나의 산업으로도 성장할 수 있다. 단군 이래 항상 불황이라는 출판산업을 성장시킬 수 있고 소위 인문학의 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 이해하기 쉬운 양질의 고전 번역서가 양산되면 고전을 외면하던 독자층도 두터워질 것이다. 지식 산업의 핵심에 번역 산업이 자리 잡을 수도 있다. 우리의 경쟁국 수준으로 번역 산업이 팽창하면 그만큼 우리의 경제 규모도 커지는 것이다.

번역학(translation studies)에는 직역과 의역과 관련된 오랜 논쟁이 있다. 최근엔 번역과 권력·헤게모니 간의 관계,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으로써의 번역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고전 번역은 교양과 관련된 문제이기 이전에 국제정치·경제와 그 역사의 영역에 속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는 “시(詩)란 번역했을 때 사라지는 그 무엇이다”라고 했다. 우리가 번역 사업을 왕성하게 추진했을 때 얻는 것은 새로운 경제 부문이요, 사라지는 것은 경쟁국의 고전 번역 성과의 10분의 1, 1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부끄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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