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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뒤끝

아내는 뒤끝이 없는 사람이다.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아내는 마음에 있는 말만 한다. 다만 마음에 말을 담아 두지 않는다. 할 말이 있으면 곧바로 하고 마음을 비운다. 대신 그 말을 들은 남편이 자신의 마음에 담아 둔다. 오래오래.

화가 나면 아내는 어휘 구사 능력이 백 배 정도 향상되는 것 같다. 평소에는 앞뒤 안 맞는 말을 하다가도 다툴 때 아내가 하는 말을 들어 보면 그렇게 논리 정연할 수 없다. 어쩌면 그렇게 적절한 인용을 하고 딱 맞는 예를 드는지 그걸 듣는 남편은 그저 말문이 막히고 입만 벌어진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일요일 아침에 아내는 식사를 준비하고 남편은 청소를 한다. 창문을 열고 진공청소기를 꺼내어 거실을 미는 남편에게 아내가 말한다.
“지금 뭐해요?” “보면 몰라. 청소하잖아.”

일요일 아침 청소는 남편 입장에서 본다면 모처럼 쓰는 선심이다. 그 자발적 가사 참여를 아내가 알아주는구나 싶어서 남편은 흐뭇하게 아내를 바라본다.
“당신 나 지금 음식 만드는 거 안 보여요? 청소를 꼭 음식 만들 때 해야겠어요?”

남편은 화가 나면 머릿속이 텅 빈다. 아내와 다툴 때 써먹으려고 책을 읽고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해 두지만 막상 다툼이 시작되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아내가 하는 말을 그저 듣기만 한다. ‘어쩌면 저렇게 말을 잘하나’ 감탄하면서 말이다. 심지어 아내의 말에 넘어가서 ‘그래, 내가 나쁜 놈이야’라고 자책까지 한다.

어쩌면 아내는 싸울 때 남편 머릿속에 있는 말을 모두 자기 머릿속으로 빨아들이는 능력을 갖고 있는 수퍼우먼이 아닐까. 단 하나의 말만 남겨 두고 말이다. 결국 나는 똑똑하고 말 잘하는 아내에게 그 말만 하고 무릎을 꿇는다.

“에잇.”
며칠 후 남편은 그때 자신이 아내에게 했어야 할 말들이 떠오른다. ‘이런 말을 해 줬어야 하는데…’라고 후회해 보지만 이미 상황은 끝난 후라서 다시 말을 꺼내는 일은 새삼스럽다.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쩨쩨한 남편은 아내에게 가서 다시 따져 보려고 말을 꺼낸다.

“저번 일요일 아침에 말이야.”
“저번에 뭐? 당신, 뒤끝 있어요?”
그렇다. 아내처럼 자기 하고 싶은 말을 그렇게 청산유수로 잘하는 사람은 뒤끝이 없겠지만, 또 있어서도 안 되겠지만 남편은 다르다. 남편은 항상 그 자리에서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쩔쩔매는 사람이라서 뒤끝이라도 있어야 한다. 나는 뒤끝 있는 남자다. 뒤끝 없는 여자와 함께 사는 남편은 뒤끝이 있게 마련이다. 이렇게.
“에잇.”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대한민국 유부남헌장』과 『남편생태보고서』책을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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