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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은 세계가 함께 나눠야, 그럴 때 더 강해진다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꼭 한 번 오십시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왼쪽)가 30일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토머스 캠벨 관장의 즉석 초청에 웃고 있다. 신동연 기자
“제가 그동안 우리나라 전국 문화유산을 답사하고 다녔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해서요. 그런데 방치된 곳이 많았어요. 굉장히 마음 아팠습니다.”

박근혜와 메트로폴리탄 관장, 정치와 예술이 만났을 때

박 전 대표가 낮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캠벨 관장이 ‘차기 대선 후보로 꼽히는 유력한 정치인이 4년 동안 공들여 문화재관리기금을 창설한 이유’를 묻자 나온 말이다. 캠벨 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매우 중요한 법안”이라며 “자국의 문화유산에 자부심을 가져야 국민이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문화재가 없어져 버리면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불행한 일이다. 훼손되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전 대표는 캠벨 관장의 말을 통역을 거치기 전에 곧바로 알아듣고 대답했다. 답변은 의사전달을 명확히 하기 위해 한국어로 하고 통역을 요청했다.

박 전 대표는 문화재관리기금법을 제정해 앞으로 5년 동안 매년 1000억원씩 모두 5000억원 규모의 기금을 조성하고 문화재 관리와 훼손 예방 등에 쓰도록 했다. 유네스코도 문화재 보호를 위해 특별기금을 조성할 것을 각국에 권고해 왔다.

박 전 대표는 문화유산 답사가 취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 ‘문화유산 답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정치에 입문하기 전까지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일이었다. 청와대에 있는 동안 나의 소망은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찾아 다니는 것이었다. 오랜 바람대로 나는 자주 여행길에 올랐다’고 썼다. 폐사지(廢寺地)에 대한 관심도 각별하다고 한다. 그의 측근은 “훼손된 유적들을 원형을 잘 살려 복원하지 않고 완전히 새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고 안타까워하시더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가 지난달 대통령 특사로 유럽을 방문했을 때다. 그는 오스트리아 멜크수도원을 방문한 뒤 “훌륭한 복원 모델”이라고 주위에 말했다고 한다. 이 수도원은 복원 이후 관광객이 몰려들어 자체 수입으로 문화재 보존이 가능해졌다. 유럽에 동행했던 한나라당 김성태 의원은 “어느 성당에 들렀었는데 (박 전 대표가) 역사며 건축 양식을 해박하게 설명해 놀랐다”고 했다.

문화재관리기금법은 17대 국회 때인 2005년 발의된 것이다. 정부가 기금을 통폐합했는데 새로운 기금을 만들기 곤란하다는 입장을 보여 법 제정이 지연됐다. 지난해 2월 숭례문이 방화로 무너졌을 때 박 전 대표는 “국민의 혼도 함께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라며 이 법안의 통과를 촉구했다. 이 법은 17대 국회에서 자동 폐기된 후 18대 국회에 다시 제출, 올해 4월에야 통과됐다. 한 친이계 재선 의원은 “박 전 대표가 발의한 법안이었기 때문에 힘을 받아 통과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9일에는 재원과 관련한 부수법안 두 개도 통과돼 기금의 기반이 확보됐다. 박 전 대표가 “어제 부수법안까지 통과됐다”고 환한 얼굴로 전하자 캠벨 관장이 “축하합니다!” 하고 활짝 웃었다.

“문화의 경계선에서 창조 이뤄져”
이후 비공개로 진행된 대화에서 박 전 대표와 캠벨 관장은 문화·예술을 폭넓게 이야기했다. 통역을 맡은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이소영(37) 큐레이터는 “매우 화기애애하게 끊임없이 대화가 이어졌다. 두 사람이 감탄사를 나누며 서로 공감하는 모습이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박 전 대표가 “문화유산은 어느 한 나라의 것이 아니고 세계가 다 함께 나누는 것이니까 더욱더 교류와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캠벨 관장이 “맞습니다!(Exactly!)”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식이었다고 한다. 캠벨 관장은 “글로벌하게 협력하고 문화유산을 보전해 가면 나라마다 고유한 문화와 정체성도 더 강화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 전 대표는 “문화 산업은 21세기의 최고의 부가가치 산업이며 문화재 보호는 관광사업에도 매우 중요하다”며 국제 교류와 협력을 강조했다. 캠벨 관장은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이 세계 문화 교류의 좋은 예”라고 말했다.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다 모여있는 곳이죠.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을 들여다보면 각기 다른 문화권의 공통 분모(common links)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날 때 새로운 것이 창조될 수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경계선에서 서로를 자극할 때 ‘창조’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박 전 대표는 미국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욕구단계설’을 인용하며 인간의 가장 높은 차원인 욕구인 자기 실현이 구현된 것이 문화라고 말했다고 한다. 캠벨 관장이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은 시공을 초월한 자기 실현이 모여있는 곳”이라고 하자 박 전 대표가 “박물관은 인류가 이룩한 자아 실현의 정수가 모여있는 곳”이라고 화답했다.

인터넷이 문화 환경에 가져온 변화도 중요한 대화 주제였다.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은 정보화 대응 속도가 늦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캠벨 관장은 사이버박물관을 제대로 만드는 일과 설명문을 붙이는 대신 첨단 기기를 이용해 관람 안내를 하는 방안에 대해 얘기를 했다. 그가 블랙베리(휴대용 단말기)를 꺼내서 보여주며 “이 작은 기계에 컴퓨터보다 더 많은 정보가 들어갈 수 있다. 박물관 관람 때 관람 안내 기기로 사용하면 교육적 효과가 클 것”이라고 말하자, 박 전 대표가 “백과사전보다도 많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정보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에 있는 미술 작품을 보다 잘 이해하고 깊이 체험하기 위해서겠지요.”

한국 미술전, 뉴욕서 큰 호응
캠벨 관장은 30일 중국을 방문하고 막 한국에 도착한 참이었다. 박 전 대표가 그에게 아시아를 방문한 이유를 묻자 그의 눈이 빛났다. “메트로폴리탄은 백과사전 같은 박물관이죠. 모든 문화권, 모든 시대의 유물이 모여있습니다. 아시아 컬렉션은 그중에서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중국과 한국에 더 큰 비중을 두면서 ‘글로벌 박물관’을 추구하려 합니다.”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올해 3~6월 열린 ‘한국 르네상스의 미술, 1400~1600년’ 전시회도 그런 시도의 일환이다. 메트로폴리탄이 자체 기획한 첫 한국 특별전이었다. 박 전 대표는 현지 반응을 궁금해했다. 캠벨 관장은 “뉴욕 타임스·월스트리트 저널 등 주요 언론이 주목했고, 5만5000명의 관람객이 몰렸다”고 설명했다.

또 “지식인층에서 특히 호응이 좋았다. 흥미와 지식욕을 자극하는 이런 (한국 관련) 전시회를 자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시회를 기획했던 이소영 큐레이터가 “조선 전기 미술에 대한 대규모 전시회는 미국에서 처음”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이씨는 이 박물관 최초이자 유일한 한국인 큐레이터다.

박 전 대표는 “메트로폴리탄의 한국실 규모가 중국·일본에 비해 작다”며 보완책을 묻기도 했다. 캠벨 관장이 “그렇게 작지는 않다”고 손을 저어 잠시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특별기획전을 통해 지속적으로 한국 문화를 알리겠다”며 “2013년 예정으로 국립경주박물관과 함께 신라유물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문화재는 법적 이유 등으로 구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상설 전시할 수 있도록 장기 대여할 수 있게 한국 측이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캠벨 관장은 한국 미술품 중 달항아리와 분청사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박 전 대표는 “한국 사람들은 분청사기의 질박한 멋을 좋아하는데 외국인들도 같은 이유로 좋아한다고 종종 말해 놀랐다”고 했단다.

박 전 대표는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없다. 캠벨 관장은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은 관광객들이 뉴욕을 방문하는 가장 큰 이유”라며 즉석에서 박 전 대표를 초청했다고 한다.

박 전 대표는 지난 5월 스탠퍼드대 초청 강연길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아시안 아트 뮤지엄’을 관람한 경험을 소개했다. 캠벨 관장은 “나도 비슷한 시기에 방문했다. 한국 컬렉션이 아주 훌륭한 곳”이라며 반가워했다. 박 전 대표가 “재미 사업가 이종문씨가 1500만 달러를 기증해 재개장한 것”이라고 설명하자 캠벨 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종문(81) 미국 암벡스 벤처그룹 회장은 종근당 창업자(고 이종근 회장)의 동생이다.

두 사람은 캠벨 관장의 전공인 태피스트리(색실로 짜서 만든 걸개 그림)를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캠벨 관장은 박 전 대표에게 미술품을 수집하는지 물었는데 “안 한다”는 이유가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박 전 대표는 “여건이 안 되기도 하지만(웃음) 내 개인이 수집하면 나만 보고 즐기게 된다. 작품은 박물관에서 수집하고, 나는 박물관에 가서 보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다.

캠벨 관장은 예방을 마친 뒤 “박 전 대표를 처음 만났는데 굉장히 사려 깊고 정중한(extremely thoughtful and gracious) 분이었다”며 “한국의 문화유산을 보전하는 데 기여하겠다는 박 전 대표의 뜻은 매우 훌륭하고도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토머스 캠벨(47)은
영국 출신. 옥스퍼드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크리스티·코톨드 인스티튜트에서 공부했다. 31년간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을 이끈 필립 드 몬테벨로의 후임 관장으로 올해 1월 취임했다. 취임 당시 40대 큐레이터가 거물들을 제쳤다고 큰 화제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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