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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이냐 전쟁이냐, 활로는 실용에 있었다

고려 초, 동아시아는 907년 나라를 세운 거란과 960년 건국한 송이 중국 대륙의 주도권을 두고 대립했고, 고려는 반거란, 친송 유교 중시 정책기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압도적 군사력을 앞세운 거란의 급팽창으로 고려는 송나라 일변도의 외교에서 탈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팽팽한 초강대국의 이웃나라가 느끼게 되는 두려움을 공감하지 못하면 서희의 외교는 그저 한낱 옛날이야기로만 들릴 수 있다.

G20시대 한국의 길, 서희에게 묻다

송과 거란의 두 수퍼 파워가 대치하는 가운데 동편에는 고려와 정안국과 여진이, 그리고 서편에는 서하(西夏· 티베트계의 당항국)가 서로 치열하게 외교전과 국지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거란의 침공이 있기 7년 전인 986년 송나라 사신 한국화(韓國華)가 고려에 와서 한편으로 위협하고 또 한편으로 이해관계를 따지면서 집요하게 거란을 협공하자고 제의한 것은 그런 맥락이다. 거란 역시 어린 나이에 즉위한 황제 뒤에서 모후 승천황태후가 섭정을 계속하는 가운데 송나라와 일전을 벌여야 했기 때문에 고려와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한마디로 서희의 협상력은 그 같은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하고 종합적인 이해가 있었기에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있는 서희 장군 흉상. [중앙포토]
993년 거란 침입과 관련해 『고려사』에서 먼저 발견되는 인상적인 사실은 놀랄 만큼 자유롭고 활발한 어전회의다. 거란의 침략 소식을 듣자마자 성종은 서희를 부사령관격인 중군사(中軍使)에 임명해 군사를 북방경계선(北界)에 배치하고, 왕 자신도 친히 서경(西京· 평양)에 행차해 적극적인 대응책을 폈다. 그 다음에 그가 한 조치가 바로 ‘여러 신하들을 모아 앞일을 의논(會群臣議之)’하게 한 일이다. 이때 나온 논의 내용에 대해서 그동안의 연구자들은 ‘항복론’과 ‘할지론(割地論)’으로 치부한 다음 서희의 ‘계책’과 대비되는 ‘한심한 의견’들로만 간주했다.

그런데 사료의 그 대목을 유심히 읽어보면, 서희의 계책이 ‘항복’을 주장하는 ‘어떤 사람의 말’과 ‘할지’를 주장하는 또 다른 의견이 충돌하는 토론과정을 거쳐서 나왔음을 알게 된다. 즉 서희가 ‘백성의 생명인 식량을 강에 버려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고 나선 것 역시 서경의 미곡 창고를 포기하려는 왕의 모습에 대한 ‘성찰과 사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서희의 ‘계책’이 마련되었고, ‘반대’가 준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일련의 토론과 시행착오를 거쳐 비로소 그러한 대책이 나온 것이다.

예비 협상부터 기선 제압
서희는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 거란 장수 소손녕과의 협상을 어떻게 이끌어갔을까. 먼저 예비 협상단계에서 기선을 잡았다. 본 협상에선,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그 다음 협상 상대방과의 신뢰 형성을 통해 대규모 전쟁을 방지하고 강동6주를 획득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본 협상에서 소손녕은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 소유인데도 너희들이 침략해 차지했다. 그리고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다. 이 때문에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며 항복을 촉구했다. 그가 원하는 핵심은 송나라와의 국교단절 및 거란과의 통교였고, 부차적으로는 고려의 영토 할양이었다. 만약 서희가 둘 다를 양보하거나, 엉뚱하게 잘못 짚어서 송나라와의 국교를 포기할 수 없다고 나왔다면, 협상의 핵심 목표를 조율하는 본 단계로 나가기도 전에 이미 대화는 파탄 났을 것이다. 다행히도 서희는 소손녕의 수를 정확히 읽었고, 그의 요구안을 둘로 분리해 대처했다.

『我國卽高句麗之舊也 故號高麗都平壤 若論地界 上國之東京皆在我境 何得謂之侵蝕乎 朝聘之不通女眞之故也』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는 바로 우리나라다.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을 국도로 삼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리고 경계를 가지고 말하자면, 귀국의 동경이 응당 우리 국토 안에 들어와야 하는데, 어떻게 침범했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중략) 귀국과 조빙이 통하지 않은 것은 여진족 때문이다.”(『고려사』21권, 열전7, 서희)

서희는 끝부분에 여진족 문제를 들어 국교수립이라는 핵심적인 조건을 받아들이면서도, 소손녕의 입장에서 볼 때 부가적인 조건인 고구려 영토문제는 수용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서희의 말에 대해 소손녕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결국 국교수립을 어떻게 할 것인가만 협상의 관건으로 남게 되었다. 적장의 핵심 사안은 양보하는 듯하면서 우리의 국익이 걸린 영토문제를 관철시키는 선택을 한 것이다. 서희의 외교협상력이 가장 돋보이는 대목이다.

외교아카데미를 서희아카데미로
서희는 이 협상을 통해 오늘날의 외교관에게도 꼭 필요한 덕목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의 핵심조건을 수용하되 최종 결론은 남겨놓는 신중한 태도다. 소손녕이 ‘거란과 고려의 국교수립’을 요구했을 때 서희가 현장에서 이 요구를 거절하면 거란과 고려의 일전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반면 거란을 상국으로 섬기겠다고 약속할 경우 자칫 고려 조정 내부의 정치적 진통과 혼란을 초래할 수 있었다. 강화를 위해 파견된 사신의 재량권을 넘어선 중대한 결정을 혼자 내렸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었다. 서희가 선택한 것은 제3의 길이었다.

『今女眞盜據 其閒頑<9EE0> 變詐道途梗澁甚於涉海 若令逐女眞 還我舊地 築城堡 通道路 則敢不修聘』
“지금 여진이 그 땅(압록강 안팎)을 훔쳐 살면서 완악하고 교활하게 거짓말을 하면서 길을 막고 있으니, 요나라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성을 돌려주어 성과 보루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해준다면, 어찌 감히 조빙을 잘하지 않겠는가.”(『고려사』21권, 열전7, 서희)

서희는 거란과 국교를 맺지 못한 것은 바로 여진족 때문이라고 했다. 양 당사국 외 제3자를 거론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는 거란의 사대외교 요구를 부정하지도, 그렇다고 거란을 송나라와 마찬가지의 상국의 예로 섬기겠다고 섣불리 약속하지도 않았다. 대신에 그는 여진족이라는 장애요인을 제시하면서 ‘사대’(事大) 대신 조빙(朝聘)이라는 가치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했다. 거란과의 전쟁을 피하되, 고려 조정에서 의논할 문제까지 결정하진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소손녕으로 하여금 최종 협상안에 조인하게 만들었다.

서희의 외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의 하나는 서희의 인격에 대한 소손녕의 신뢰였다. 서희가 보여준 당당하면서도 예법에 맞는 언행과 공적인 태도는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데 주효했다. 서희의 협상 리더십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정치의 대체(治體)를 아는 지도자의 정도(正道) 실천이었던 것이다.

협상 상대자인 소손녕을 다시 볼 필요도 있다. 그간 소손녕은 서희의 담판에 휘둘려 압도적으로 많은 군대를 이끌고 와서도 오히려 강동6주를 내주었고, 적지 않은 예물까지 실어서 보낸 어리숙한 인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결코 그가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선 그는 군량미를 현지에서 조달해야 하는 군대를 이끌고 나왔는데, 안융진 전투의 패배와 고려 조정의 청야(淸野)작전으로 장기전으로 갈 위험에 처했다. 고려와 전면전을 벌일 경우 과거 수 양제나 당 태종이 그랬던 것처럼 자칫 군량미 부족으로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을 이끌고 겨울 전쟁을 치러야만 했을 수 있다. 다행히 서희가 압록강 안팎을 돌려주면 송 대신 거란에 조빙하겠다고 말함으로써 ‘배후의 안전’이라는 거란의 전쟁목표를 성취시켜 주었다.

소손녕이 거둔 외교적 성과는 고려로 하여금 당시 ‘거란을 중심으로 형성되던 동아시아의 새로운 국제질서(Pax-Qidana)를 수용’하게 만든 것이다. 거란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안융진 담판(993)보다 10여 년 뒤인 1004년에야 확정됐다. 고려가 그 질서를 앞서 받아들인 것이다. 거란으로선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소손녕의 외교적 성과는 거란의 2, 3차 침입 때 전과를 보면 더욱 극명해진다. 즉 1010년에 거란의 성종(聖宗)이 친히 40만을 이끌고 쳐들어왔지만 고려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별 성과 없이 물러갔으며, 그 후 다시 8년 뒤인 1018년 소손녕의 형 소배압은 10만 군대를 이끌고 침입했다가 귀주에서 강감찬에게 크게 패하고 돌아갔다. 요컨대 무모하게 전쟁을 벌였다가 성과 없이 또는 대패하여 돌아간 거란 국왕이나 소배압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외교협상으로 서로가 원하는 바를 주고받은 소손녕은 결코 게임에서 진 자가 아니라 반대로 서희와 함께 ‘윈윈 게임’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한 외교관의 지혜, 협상력이 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우리 정부가 전문화·정보화시대에 경쟁력 있는 정예 외교관 양성을 위해 외교아카데미를 세운다는 방침을 확정하고 내년 2011년 첫 입학생을 받는다는 목표를 세웠다. 서희와 같은 유능한 협상 리더를 배출하는 차원에서 외교 아카데미의 명칭은 ‘서희외교아카데미’로 하는 것이 어떨까 제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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