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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금리로 시작돼 출구전략으로 막 내릴듯

1992년 ‘유럽통화제도(EMS) 위기’, 94년 ‘그린스펀 쇼크’, 97년 ‘아시아 금융위기’, 98년 ‘헤지펀드 학살’. 90년대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든 사건들이다. 여기서 문제 하나. 수많은 금융시장 플레이어를 죽음과 같은 파산으로 몰아넣은 이 사건들 이면에는 공통적인 배후가 하나 있다. 누굴까? 영국 로스차일드나 베어링, 미국의 모건이나 골드먼, 삭스, 쿤(Kuhn), 로브(Loab) 등 앵글로색슨이나 유대계 금융귀족들이 아니다. ‘캐리 트레이더(Carry Trader)’들이다.

글로벌 금융시장의 새 유령, 달러 캐리트레이드

그들은 금융시장 ‘바이러스’ 또는 ‘유령’으로 불린다. 헤지펀드나 사모펀드, 뮤추얼펀드 모습을 하고 나타날 때도 있다. 심지어 시중은행이나 저축은행의 모습을 하고 움직이기도 한다. 하지만 음모론의 주인공으로 곧잘 등장하는 금융귀족들과는 거리가 멀다. 국가나 대기업을 상대로 고도금융을 하지 않는다. 대신 금리가 낮은 나라에서 돈을 조달해 높은 나라에 베팅해 금리 차를 따먹는다. 아주 눈치 빠르고 행동이 기민하다.

요즘 그들이 다시 한번 돌연변이를 거치고 있다. 10여 년 동안 즐겨 사용한 엔화 자금을 버렸다. 대신 글로벌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를 가지고 게임을 벌이기 시작했다. 글로벌 금융시장이 안정되기 시작한 올 5월 이후 나타난 현상이다. 8월 이후부터는 그들의 캐리트레이딩이 부쩍 심해지고 있다. 미 달러 자금을 빌리는 비용(금리)이 엔화 자금보다 싸졌기 때문이다.

달러·엔, 캐리트레이더들의 축구공
미국 돈 값이 일본 돈 값보다 쌌던 것은 93년 이전이다. 그때까지 미국 경제는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댄 반면 일본 경제는 고속 순항했다. 그러나 93년 이후 미 경제는 침체에서 벗어난 반면 일본은 가미카제 거품의 후유증을 본격적으로 앓기 시작했다. 미국 금리는 오르고 일본 금리는 본격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캐리트레이더들이 달러 대신 엔화 자금을 끌어다 게임하기 시작했다. 그 후 16년. 이번엔 금융위기로 미국 경제가 주저앉으면서 달러 캐리가 일어나고 있다. 미국이 세계에서 돈 값이 가장 싼 나라가 됐기 때문이다. 3개월 만기 달러 리보(영국 런던은행 간 거래 금리)가 0.28%인 반면 엔화 리보는 0.35% 수준이다. 쉽게 달러 자금 값이 오를 것 같지 않다. 미·일 경제 회복의 차이 때문만이 아니다. 정치적인 변수가 달러 가치를 떨어뜨리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본 자민당 장기 집권을 막은 민주당 출신 재무장관인 후지이 히로히사(藤井裕久)는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외환시장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엔화 강세를 용인하겠다는 뜻이다.

게다가 최근 미국 피츠버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도 달러 약세를 부추겼다. G20 정상들은 “글로벌 경제의 회복이 꾸준히 이어질 것이라는 판단이 들 때까지 경기부양을 계속한다”고 합의했다. 순간 뉴욕·런던 외환시장에서 달러 가치가 더욱 떨어졌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쉽사리 기준금리를 올리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힘을 얻으면서다.

전문가들은 달러·엔을 ‘캐리트레이더들의 축구공’으로 부른다. 신나게 공 하나로 놀다가 낡으면 미련 없이 바꿔 차면서 노는 모습을 빗댄 말이다. 실제 달러와 엔화는 브레턴우즈 시스템이 붕괴하고 외환거래 규제가 풀린 70년대 중반 이후 주기적으로 캐리트레이딩 대상이 됐다. 70년대 후반 달러 캐리가 기승을 부리다 80년대 후반에는 엔 캐리로 바뀌었다. 다시 90년대 초 달러 캐리 시대를 거쳐 90년대 후반 엔 캐리가 글로벌 시장을 휘저었다.

요즘 월가에서는 “미국 중앙은행이 패닉 진정을 위해 금융시장에 쏟아부은 자금이 캐리머니(Carry Money)로 둔갑하고 있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 금융회사들이 모기지 관련 자산을 FRB에 팔아 조달한 자금을 미국보다는 다른 나라에 투자하는 자금으로 전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회사 입장에선 아주 합리적인 전략일 수 있다. 주택시장이 여전히 불안하고, 재무부 채권 수익률이 바닥을 헤매고 있는 마당에 미국 내 자산에 투자해 봐야 안전하지도, 높은 수익률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그 대안으로 값싼 달러(Easy dollar)로 무장한 캐리트레이더들이 미국 밖의 채권·주식 시장뿐 아니라 상품시장에 과감하게 베팅하고 있다”고 BNP파리바의 외환시장 분석가인 세바스티앵 갤리는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올 들어 50% 안팎 급등한 주가나 상품 가격 이면에는 달러 캐리가 있다는 분석도 힘을 얻고 있다. 경기회복 가능성이나 기업의 실적개선 전망만으로 이 정도의 주가 급등을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월가 전문가들은 현재의 시장 흐름을 “금융시장 안정→경기·실적 개선 기대감 고조→달러 캐리 활성화→자산·상품 가격 급등”으로 해석했다.

달러 캐리는 저금리에 따른 달러 약세 때문에 일어났지만 동시에 달러 가치를 더 떨어뜨리고 있다. 저금리 정책→달러 가치 하락→캐리트레이딩 본격화→달러 가치 추가 하락의 악순환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들이 달러 자금을 마련한 뒤 투자할 대상 국가의 통화로 환전하는 과정에서 달러를 팔면 그만큼 달러 공급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하버드대 제프리 프랑켈(경제학) 교수는 “캐리트레이딩은 국지적 버블을 일으킨다”고 말했다. 버블 붕괴가 낳은 충격을 치유하려는 저금리·통화팽창 정책이 캐리트레이딩으로 이어지면서 일부 증권이나 상품 시장에서 값이 급등하는 일이 곧잘 일어난다는 것이다. 프랑켈 교수는 90년대 중반 엔화 자금이 동남아 부동산 거품을 일으킨 사건을 예로 들었다.

캐리트레이딩의 끝은 비극
프랑켈 교수는 “거품은 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캐리트레이딩의 끝은 비극적”이라고 단언한다. 이미 글로벌 시장은 캐리 자금 역류가 낳은 비극을 80년 이후 10여 차례 경험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80년대 남미 외채위기도 캐리 자금의 역류 탓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70년대 후반 미국의 저금리 정책 탓에 중동의 오일달러가 미국 대신 남미로 대거 흘러들었는데, 80년 이후 달러 캐리가 역류하는 바람에 외채위기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또 92년 독일 마르크 캐리가 역류하는 바람에 영국과 이탈리아 등이 자국 통화가치를 평가절하하며 유럽통화제도(EMS)에서 이탈하기도 했다. 이 일로 통합화폐 유로(euro) 탄생으로 가는 여정이 상당 기간 지체됐다.

그 밖에 94년 초 앨런 그린스펀 당시 FRB 의장의 전격적인 금리 인상 뒤에 발생한 소용돌이나, 값싼 일본 자금 탓에 부풀어 오른 동남아 거품이 97년에 붕괴한 것, 98년 러시아 모라토리엄(채무상환 연기)과 롱텀캐피털 사태 직후 엔화가 급등하면서 수많은 헤지펀드가 파산한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역류가 낳은 에피소드들이다.

역류의 방아쇠는 무엇일까? 프랑켈은 “비극의 단서는 캐리트레이더의 별명인 ‘스투저(Stoozer)’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스투저는 신용카드회사가 수수료를 물리지 않을 때 현금서비스를 받아 은행에 맡겨 금리 차를 따먹던 사람들을 일컬었다. 이들의 수법이 캐리트레이딩과 흡사해 스투저가 캐리트레이더 별명으로 자리 잡았다. 스투저들은 카드회사가 수수료를 물리기 시작하면 화들짝 놀라 예금을 인출해 카드대금을 황급히 메운다. 이는 캐리트레이더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프랑켈은 카드회사가 수수료를 물리는 행위와 비슷한 일이 발생하면 달러 캐리가 역류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게 바로 출구전략이다. 미 FRB가 위기 진정을 위해 풀어놓은 유동성을 흡수하기 위해 금리를 올리기 시작하면 해류처럼 한 방향으로 흐르던 달러 캐리가 갑자기 역류하기 시작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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