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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부 입주 앞서 1000명이 5개월간 대청소

중난하이 8대 명소 중 하나인 자광각(紫光閣) 앞에서 담소하는 중난하이의 새로운 주인들. 왼쪽부터 주더, 마오쩌둥, 천윈, 저우언라이. 김명호 제공
베이징을 대표하는 맥주의 상호를 1200여 년 전에 만들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에 ‘서울 경(京)자’를 붙인 최초의 인물은 돌궐족의 후예 사사명(史思明)이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33> 新중국 건국 전야④ 중난하이 새 주인들

당(唐) 현종(玄宗) 시절인 755년 안록산(安祿山)이 조정에 반기를 들자 그의 추천 덕에 병마사(兵馬使) 자리에 오른 사사명도 반란에 합류했다. 안록산은 범양(范陽)에서 황제에 즉위하며 범양을 대도(大都)라 개칭했다. 안록산이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자 사사명은 투항했지만 1년 만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대연(大燕) 황제를 칭하며 대도의 명칭을 연경(燕京)으로 바꿔버렸다.

연경(燕京)은 연산(燕山)산맥의 동남쪽에 위치한 호수와 늪지대였다. 수초가 우거지고 학이 서식하는 음산한 절경지였다. 송(宋) 왕조 시절 북방에서 흥기한 요(遼) 왕조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 늪지대에 행궁(行宮)을 설치했다. 요를 멸망시킨 금(金)은 한술 더 떴다. 정식으로 연경에 천도해 토목공사를 일으켰다. 강과 연못을 파고 호수와 늪을 정리해 황궁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베이하이(北海) 공원과 중난하이(中南海) 일대였다.

1271년 원(元) 제국의 건설자 쿠빌라이(忽必烈)도 연경을 수도로 했다. 대도라고 개명한 후 사방 60리에 도성을 쌓았다. 요와 금이 축조한 황궁의 면적을 넓히고 호수를 파댔다. 건조한 초원에서 물을 찾아 다니던 유목민족들이다 보니 물은 생명처럼 소중했다. 꽃이 만발한 정원보다 더 아름다웠다. 몽고인들은 ‘수(水)’를 정원을 의미하는 ‘해(海)’ 혹은 ‘해자(海子)’라고 불렀다. 도성 안에 인공호수를 만들어 스차첸하이(什刹前海), 허우하이(後海), 베이하이(北海), 중하이(中海), 난하이(南海)라 명명했다. 몽고인들은 100년을 채우지 못하고 초원지대로 쫓겨났다.

베이징의 건설자는 한결같이 초원에서 출발해 제국을 건설한 유목민족들이었지만 본격적인 개발은 한족 정권인 명(明) 건국 이후였다.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난징(南京)에 수도를 정하고 대도를 베이핑(北平)으로 개명했지만 세 번째 황제 영락(永樂)은 베이핑으로 천도해 베이징을 탄생시켰다.

영락은 금·원의 황궁을 더 이상 확충하지 않았다. 대신 동쪽에 거대한 규모의 자금성(紫金城)을 건조하고 금·원대의 황궁은 시위안(西苑)으로, 인공호수는 시하이쯔(西海子)로 개칭해 피서행궁으로 사용했다.

17세기 중엽 산해관을 넘어와 청(淸) 왕조를 수립한 만주족들은 황궁을 계속 넓혀 나갔다. 배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호수를 깊이 파고 연꽃을 심었다. 인공산을 만들어 나무도 심었다. 5개 왕조가 700여 년에 걸쳐 건조한 시위안의 세 호수는 산, 물, 섬, 다리, 정자, 누각이 어우러진 별천지였다.

중난하이와 베이하이를 분리시킨 사람은 위안스카이였다. 1911년 발발한 혁명 덕에 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는 중하이와 난하이에 대총통부를 설치한 후 베이하이와 중하이의 경계선에 살벌한 담을 쌓았다. 안전이 이유였다. 베이하이는 서민들의 휴식 장소로 공개했다. 자금성과도 완전히 격리시키기 위해 사이에 길을 만들고 양쪽에 담을 쌓았다. 중난하이는 완전한 성역으로 자리 잡았다. 면적은 자금성의 3분의 1, 베이하이 공원의 두 배였다.

위안스카이가 죽자 중난하이는 정객과 군벌들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10년간 주마등처럼 거쳐간 군벌이 9명이었다. 마지막 주인은 동북 군벌 장쭤린(張作霖)이었다.
장제스가 북벌을 완수하고 난징에 국민정부를 수립하자 베이징은 다시 베이핑이 됐다. 베이핑 시는 위안스카이가 쌓았던 담장을 허물고 중난하이도 일반에 공개했지만 정부가 파견한 대규모 병력이 중난하이에 주둔하면서 다시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1937년 여름 일본군이 베이핑을 점령하자 이번에는 괴뢰정부가 중난하이를 접수했고 일본이 항복한 후에는 다시 국민당 군대의 주둔지가 됐다. 국·공 간에 전면전이 발발한 후에도 중난하이는 푸쭤이(傅作義)가 지휘하는 화북지역 공산당 토벌 총사령부의 소재지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완벽하게 보존된 황실 정원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닌 중난하이는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지저분하고 흉한 몰골로 변했다.

1949년 1월 마지막 날 화북야전군은 평화리에 베이핑을 접수했다. 신정권의 입주지를 물색하던 중 중난하이를 주목했지만 전체 면적의 70%를 차지하던 호수의 물빛은 검붉었고 도처에 쓰레기와 인분이 널려 있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악취가 사방에서 진동했다. 1000여 명이 5개월간 불철주야한 후에야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신중국 선언 4개월 전부터 당 중앙과 주요 간부들이 중난하이에 거처하며 집무를 보기 시작했다.

왕조가 교체될 때마다 베이징은 명칭이 바뀌고 변화가 무상했다. 그 과정에서 중난하이도 온전할 수 없었다. 중난하이를 온갖 유린을 당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고귀함을 더해간 여인에 비유하는 사람이 많다.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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