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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시시각각] 역사에서 못 배우는 인간의 어리석음

인간의 어리석음은 역사의 교훈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늘 어리석음을 되풀이한다. 지금 우리는 또 한번 그런 순간에 있다. 먼저 옛 어리석음을 살펴보자. 20세기 초 유럽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열린 파리 평화회의를 지켜본 케인스는 로이드조지 영국 총리와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윌슨 미국 대통령을 두 명의 달인(達人)과 한 명의 성인(聖人)이라 평했다. 클레망소는 독일이 다시는 프랑스를 넘보지 못하도록 요절낼 심사였다. 로이드조지는 보다 온건했지만 여론을 달래기 위해 독일에 준엄한 심판을 내려야 했다. 윌슨만이 미국민의 뜻에 따라 관대한 처분을 베풀길 원했다. 정치의 달인 클레망소와 로이드조지는 순진한 성인 윌슨을 설득했고 결국 승자 독식의 카르타고식 평화조약이 체결됐다. 뒤늦게 너무 가혹하다는 걸 깨달은 로이드조지가 다시 윌슨을 설득하려 했지만 한번 굳은 성인의 마음을 바꿀 순 없었다. 조인식 후 로이드조지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우리는 앞으로 25년 내에 지금보다 세 배 많은 비용으로 이 일을 다시 해야 할 것이다.”

어리석음은 늘 미사여구로 포장되기 마련이다. 평화회의 후 독일은 “등 뒤에서 칼 꽂기”라는 원한으로 들끓었고, 그것은 히틀러 집권의 씨앗이 된다. 연합국 지도자들은 위험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한 판결이 곧 너그러운 판결”이란 그럴 듯한 말로 문제를 덮어버렸고 로이드조지의 암울한 예언은 현실이 되고 만다.

우리가 되풀이할 어리석음도 듣기 좋은 말로 포장돼 있다. ‘행복’이 그렇고 ‘세종’이 그렇다. 수도권 집중 해소와 지역 균형발전이란 명분이 그렇다. 하지만 값싼-그러나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할-포장지를 걷고 나면 재앙에 가까운 ‘유령 도시’의 그림자가 슬금슬금 기어 나온다. 누구나 알고 있다. 그것이 오랜 숙고의 결과가 아니라 2002년 노무현 민주당 대선 후보가 급조해 “재미 좀 본” 행정수도 이전 공약의 쓴 열매란 걸 말이다. 2004년 “수도는 서울이라는 게 관습헌법”이라는 헌재의 위헌 판결이 나오면서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기형이 된 행복도시 계획이 원안대로 진행되면 도시 기능은커녕 행정 비효율만 초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끝내 “25년 내 지금보다 세 배 많은 비용을 들여 원위치로 되돌리는 일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이유 있는 걱정을 말이다. 그런데도 입씨름이 그치지 않는 건 거기 걸린 가파른 이해 때문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말이다.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현실을 직시하는 차가운 이성이 있어야 한다. 욕심이라는 색안경 너머로는 한 줌 이익 뒤에 가려진 아름드리 해악이 보이지 않는다. 이성의 각막에 비치는 형상은 간결하다. ‘지키긴 해야 하는데 그대로는 곤란한 약속’과 다름 아니다. 욕심을 버리면 답이 보인다. 정파적 이익을 버리고 국가 이익을 생각하면 의외로 간단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클레망소가 강경한 입장을 고수한 건 평화보다 보복을 앞세운 근시안적 여론 탓이었다. 로이드조지도 가는 곳마다 유권자들로부터 “독일의 버르장머리를 고치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여론은 한 걸음 늦지만 끝내 진실 앞에 다가서는 법이다. 자신들이 잘못 판단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여론은 그 책임을 두 지도자 탓으로 돌리고 그들을 버린 뒤 금세 잊었다.

국가 이익을 생각하는 길은 험해도 목적지까지 이어진 길이다. 하지만 정파적 이익의 길은 언제든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고 만다.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는 삼척동자도 알 일이다. 신은 다른 걸 신었어도 목적지는 같은 거다. 거기까지 무사히 가려면 남의 다리 딴죽 걸기보다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걸 피해야 한다. 남의 잘못은 쭉정이처럼 날리지만 자기 허물은 도박꾼의 눈속임처럼 쉬이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법구경』에 나오는 말이다.

이훈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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