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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家를 찾아서]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이간 家

명문가란 통상 한 집안에서 정치인·관료·학자·기업인 등이 다수 배출된 경우을 말한다. 천안·아산에서 명문가로 일컬을 만한 집안을 소개해 본다.

“사람과 금수의 본성은 같다”
후손 4대 연속 사마시 합격


외암리의 이간 묘와 묘비.
아산 송악면 외암리는 민속마을로 유명하다. 외암(外岩)의 지명은 조선시대 학자로 이름을 날린 외암(巍巖) 이간 (李柬, 1677~1727)의 호와 일맥상통한다. 이 마을은 예안(禮安) 이씨의 집성촌이었다. 현재 이씨 후손들의 벼슬이름이나 아호 등을 딴 건재고택·감찰댁·참판댁·참봉댁 등 기와집과 초가집이 잘 보존돼 있다. 설화산 기슭 동남쪽의 이 마을엔 돌이 많다. 이준봉(56)외암민속마을보존회장은 “설화산이 화산 활동을 한 산이기 때문”이라며 “그 돌로 만든 담장의 총 길이가 6㎞에 달한다”고 말했다. 이 돌담장이 외암마을의 정취를 자아낸다.

예안 이씨가 이 마을에 정착한 것은 조선 선조대인 16세기 경. 이곳의 예안 이씨는 그후 많은 관리를 배출하고 있다. 외암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고조부는 군자감 주부(主簿·군수품 관리 종6품), 증조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정3품 무관), 조부는 전라도 수군절도사(수군 지휘자 정3품)를 지냈다. 그리고 외암은 양부와 생부가 있는데 양부는 부호군(副護軍·종4품 무관), 생부는 군수(정5품)를 지냈다.

외암은 조선시대 성리학 3대논쟁 중 하나인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중심에 섰던 인물로 일생을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자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자손들은 진사·생원시에 잇따라 합격한다.

광덕산 강당골의 ‘관선재’ 앞에 선 이원직 외암사상연 구소장(왼쪽)과 이준봉 외암민속마을보존회장.
두 아들은 외암 사후인 영조 11년(1735년), 14년(1738년) 각각 진사·생원시에 합격하고, 손자는 생원시, 증손자 두명도 사마시, 현손은 순조 22년(1822년) 생원시에 합격했다. 외암 후손들이 4대에 걸쳐 잇따라 사마시(진사생원시)에 합격한 것이다.

◆외암 이간=우암 송시열의 학맥을 이은 수암 권상하의 제자다. 나이 50세의 짧은 삶 동안 관직을 멀리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동물 등 인간(人)과 다른 물(物)도 그 본래적인 성(性)에 있어선 다 같다”는 이른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했다. 사람과 금수의 근본적 차이를 강조하는 같은 스승 밑의 한원진(1682~1751)과 대립했다. 한원진의 ‘이론(異論)’은 호서지방 학자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져 호론(湖論)으로, 외암의 ‘동론(同論)’은 서울 학자들이 찬성하고 나서 낙론(洛論)으로 불리워졌다. 낙론 대표학자는 이재(1680~1746, 대제학 역임), 박필주(1665~1748, 이조판서), 어유봉(1672~1744, 승지) 등.

아산 송악면 외암민속마을 전경.
또 하나의 중요한 이론은 미발심체순선론(未發心體純善論)이다. “인간 마음(심체)의 본체인 미발은 애시당초 선하다”는 견해다.

지난해 외암의 시와 글이 고스란히 담긴 『외암유고』가 번역됐다. 『역주-외암 이간의 철학과 삶』(온양문화원) 의 발간 축하의 글을 고려대 윤사순 명예교수가 썼다.

윤 교수는 외암의 인물성동론의 의미를 세가지로 말하고 있다. 대외적으로 호란이후 오랑캐로 인식돼 북벌의 대상이었던 청에 대한 융화책의 근거가 됐고, 사회적으론 사농공상의 신분 차별을 조금이나마 해소시킬 수 있는 이론이었다고 한다. 윤 교수는 “오늘날의 민권, 인권의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외암은 금수는 물론 자연전체를 존귀하게 생각하고 있어 자연친화적 면모까지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광덕산과 관련한 한 시에서 그 일단을 읽을 수 있다. ‘하늘에서 낸 이름과 실제가 다르지 않아/ 높고 웅장해 모든 걸 수렴하면서도 화려하지 않구나/ 산세가 외암마을에 치우쳤다고 말하지 마라/ 자손이 사방에 퍼져 집안을 이뤘도다’

◆북학파로 이어지다= 예안이씨 수원·온양파종회장인 이원직(70)외암사상연구소장은 “외암의 사상은 낙론으로 서울 노론파의 근본 사상으로 발전하고, 후일 담헌 홍대용(천안 수신면 출신)·연암 박지원 등의 북학파로 이어지는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종래 성리학자들이 소중화주의를 내세워 청의 문물을 배타시 한 것과 달리 북학파 학자들이 북학, 즉 청의 학문을 받아 들이고 있는 건 외암의 인물성동론의 사상적 기초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설명이다.

고려대 이승환 교수(철학과)는 역주집 해제에서 “영조대 탕평책에 영향을 줬을 것이고 외암의 사상을 보건대 그를 지지한 낙론계열 학자들이 북학으로 연결되는 것도 이해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사상사적으로 볼때 외암이 주축을 이룬 호락논쟁이 조선 유학사상을 한단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했다.

외암마을의 건재고택(사진) 가까이 이간이 태어난 집터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암과 외암=수암 권상하(權尙夏,1641~1721)에게 외암이 찾아간 것은 31세였던 1708년이었다. 황강(충북 제천 한수면)에 있던 수암에게 문인이 될 것을 간곡히 청하는 글을 올렸다. 그의 학자 됨됨이를 알아 본 수암은 외암에게 추월헌이라는 또 다른 호를 지어준다.

자신의 별호 한수재가 "추월(秋月)이 한수(寒水)를 비친다”는 뜻임을 밝히고 그 일부에 해당하는 추월헌을 외암에게 호로 선사한 것이다. 윤사순 교수는 “이는 스승이 제자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예우”라면서 “이는 외암이 율곡-우암(송시열)-수암으로 이어지는 노론 학통에 정식으로 들어간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수암은 또 외암이 강학을 펼쳤던 광덕산 계곡 건물의 편액도 보내준다. 외암은 1708년 ‘관선재’(觀善齋)를 짓고 절친한 벗 천서(泉西) 윤혼과 후학을 가르친다. 현재 광덕산 아산방면 계곡의 이름인 ‘강당(講堂)골’은 이 관선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황강에 있던 수암을 따르던 제자를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라고 부르는데 정확히 누구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외암, 한원진, 윤혼, 최징후, 이이근, 채지홍, 윤봉구, 성만징, 한홍조 등이 자주 거론된다.

현재 관선재는 사찰의 일부로 돼 있다. 이와 관련 이원직 소장이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줬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져 관선재가 헐릴 위험에 처하자 인근의 선비들이 스님 몇 분을 이곳에 모신 후 ‘이곳은 서원이 아니라 절’이라고 주장해 화를 면했다.”

※성리학 3대 논쟁=16세기 이황-기대승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17세기 노론-남인의 예송(禮訟), 호락논쟁을 말한다.

글= 조한필 기자, 사진= 조영회 기자

“학문에 전념한 외암의 뜻 받들지어다”
외암 이간 신도비


외암의 신도비(사진)는 외암리 묘소 앞에서 민속마을 입구로 옮겨져있다. 글은 지돈령부사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이 지었으나 당대에 신도비는 세워지지 않고 1924년 세워졌다. 글씨는 당대 명필인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71세 때 썼다.

홍직필은 본관이 남양으로 문장이 뛰어나고 경서는 물론 제자백가에 통달했다. 평생 대사헌·형조판서 등 많은 관직에 임명됐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낙론계로 외암의 인물성동론을 따랐다.

윤용구는 글씨·서화에 뛰어나 해서·행서·금석문을 많이 썼다. 본관은 해평. 1871년 문과에 급제, 예조·이조 판서를 지냈다. 법부·탁지부·내무 대신에 10여 차례 임명되나 모두 사절하고 서울 근교에 은거. 한일합방후 일제가 남작을 수여했으나 거절.

홍직필은 신도비의 끝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뚝 솟은 온양의 산 기슭에 고요한 무덤이 있네. 이에 석장을 높이 들어 그 성령을 밝히나니. 힘쓸지어다 후세들이여, 이를 법으로 삼고 이를 길로 삼아라.”


죽은 부인을 기리며…

외암은 두명의 파평 윤씨와 혼인을 맺는다. 첫째 부인은 그보다 12년 먼저 세상을 떠난다. 그때 외암은 직접 부인의 행장(죽은 사람의 평생을 적은 글)을 지었는데 그 내용이 너무 애틋하고 정겨워 소개한다. 1715년 8월, 외암이 38세 때의 일이다. 

‘망실안인윤씨행장’
(亡室安人尹氏行狀)(『외암유고』 권16)
*안인: 정7품·종7품 문무관 아내의 품계


망실(죽은 부인)은 매양 남편의 미간을 살펴 근심하는 기운이 있으면 곧 위로하며 말하길 “재산 유무와 배곯고 배부른 일은 오직 저에게 달렸으니, 장부는 본디 관여하는 바가 아니다”고 했다. …(중략) 망실은 자신은 비록 겨울에 솜옷을 입지 못하고 여름에 베옷을 입지 못하며, 먹는 것이 없고, 발에 신발이 없어도 하나도 문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시부모님께 배고픈 빛이 있는 것을 지극한 한으로 여겨, 음식 맛이 없으면 방안에 몸을 숨기고 고민하며 발을 구르며 스스로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근근이 20년을 함께 하루같이 지냈는데, 망실이 갑자기 죽었다.

…망실은 떨어진 옷과 검소한 복장을 편안히 여겨, 부끄러운 빛을 내거나 어디 견준 적이 없다. 궁핍한 것을 친정 자매·형제에게 내비치지 않았다. 형제가 서로 모이게 되면 먼저 여종에게 “너는 저쪽 여종에게 집안의 세세한 일을 말하지 말라”고 꼭 주의시켰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가난함을 듣고 도와줘도 미치지 못하고, 안 도와주면 마음이 편안치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식솔이 20여 명으로 한 해 거둔 것으로 몇 달을 가지 못했다. 시집올 때 입고 온 옷, 밭, 노비를 팔았다. 물건을 사고 팔 때 세세하고 비루하게 처신하지 않았다. “소인배처럼 이익을 불려 내가 감히 나의 남편 이름에 누를 끼칠 수 없다” 하였다. 아아! 그 지조있고 결백함이 이와 같았다.

…이런 망실이 죽고 말았다. 반평생 고심했던 것을 누가 상 줄 수 있겠는가. 살았을 때 입은 옷 중에 깨끗하고 성한 것이 없다. 망실은 평소 자신의 뜻이 더럽히지않길 바랄 것이다. 땀에 절고 해진 옷과 홑치마 등 즐겨입던 옷을 관 속에 넣는다. 남편으로서 서로를 잘 안다고 자처해왔으나 급한 일을 당하니 아아! 부끄럽기만 하다.

…남편이 하고 싶어 하지 않을 일은 법처럼 피하고, 남편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몸의 수고로움과 재산의 유무를 헤아리지 않고 행하였다. 남편이 훌륭한 덕으로 스스로 서기를 원해 남편이 남에게 은혜를 베풀고 의리를 행할 때 전혀 꺼리는 일이 없었다. 남편에게 간언함도 절실했다. “당신은 성품이 지나치게 강합니다. 부모님을 모실 때에도 낯빛이 즐겁고 부드러움에 강직함이 배어있습니다. 이러고도 배움에 귀함이 있겠습니까.” 아아! 일반적 부인의 행실과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

…망실은 아플때도 심하지 않으면 하루도 누워있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6월 갑자기 더위를 먹고 기절해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아아 슬프다. 추위와 굶주림이 교대로 망실의 몸을 갉아먹어 심혈이 안에서 소모됐다. 깨닫지 못하는 사이, 병이 그 틈을 탄 것인가? 생사의 변화가 어찌 이리더 급하던가? 향년 겨우 40세다. 딸 하나, 아들 셋을 뒀는데 딸은 시집을 준비 중으로 아직 가지 못했고 어린 아들은 겨우 돌을 지났다.

…20년 동안 곤궁해 고생만 했는데 늙기도 전에 아침 이슬처럼 급하게 떨어졌다. 복은 과연 무엇이고 수(壽)는 대체 어디 있는가? 딸과 아들이 시집 장가를 가더라도 망실은 죽어서 보지도 알지도 못할텐데 이를 복이라 이를 것이가? 자녀들이 어머니 얼굴을 기억해도 그 세세한 일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이에 그 대강을 차례로 적어 망실의 사람됨을 남겨둔다. 아아! 죽은 사람에 대한 섭섭함을 달래는 방법이 오직 이것 뿐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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