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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라면왕’ 이철호씨 내한

17세 때 노르웨이에 건너가 요리사·라면사업으로 성공한 이철호씨와 그의 딸 이리나가 조카인 이한배(오른쪽)·한선(왼쪽)씨 형제와 포즈를 취했다. [조영회 기자]
2000년 12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르웨이로 노벨평화상을 타러 갔을 때의 일이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김 전 대통령을 ‘미스터 리(李) 조국의 대통령’으로 불렀다. 현지 언론은 첫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한국을 취재하기 위해 미스터 리에게 몰려 들었다. ‘미스터 리’는 노르웨이에선 이철호(72)씨를 가리키는 동시에 라면 브랜드를 지칭한다. 그는 17세에 노르웨이에 건너가 요리사와 라면사업으로 성공했다. 그런 그는 천안사람이다.



“아버지 고향은 한국의 천안이란다”
“혈육 느끼게 하려 막내 딸 함께”

18일 조카 결혼식에 참석하기위해 막내 딸과 함께 천안을 찾은 그를 만났다.



노르웨이에서 ‘라면왕(King of Noddle)’으로 통하는 그는 “큰 조카가 늦게나마 결혼한다고 해 너무 기뻐 한걸음에 달려왔다”며 “몇 년에 한 번씩 천안에 오는데 올 때마다 달라지는 모습에 놀란다”고 말했다.



그는 13살 때인 6·25 전쟁 중 가족들과 헤어져 미군 부대를 따라 다니며 구두닦이 생활을 했다. “가족들이 어느 시골로 피난을 갔는 데 북새통에 나만 떨어진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는 17살 때인 1954년 허벅지에 폭탄 파편이 박히는 큰 부상을 입고 부산의 병원에 후송됐으나 치료가 쉽지 않자 노르웨이 의료진에 의해 본국 병원으로 후송됐다.



그때 이후 그는 부상 후유증으로 한 다리를 절고 있다. 회복 후 그는 노르웨이에 남았다. 최초의 노르웨이 거주 아시아인이 된 것이다. 노르웨이 생활은 고행의 연속이었다. 호텔 식당 청소부 등으로 일하면서 먹다 남은 음식 등으로 연명했다. 딱딱해진 빵을 물에 불려 먹기도 했다. 미군 부대에서 익힌 영어로 소통을 하면서 노르웨이어도 단숨에 익혔다. 어깨 너머로 요리도 배웠다. 잘 따라 하는 것을 대견해 한 호텔 요리사들이 학교가는 걸 주선해 줬다. 스웨덴으로 놀러 갔다가 사고를 당해 하루를 빼먹은 것 말고 개근했다. 성적도 상위권이었다.



국내에서 ‘미스터 리’ 라면이 출시된 2007년 당시의 이철호씨.
◆라면왕이 되기까지=노르웨이에서 요리사로 명성을 얻고 있던 34세 때(1971년) 한국에 서양요리를 가르치러 오게 됐다. 꿈에도 그리던 조국 땅을 밟았다. 수소문 끝에 천안의 가족을 다시 찾는 기쁨을 누렸다. 조국은 그에게 또 하나의 기회를 선사했다.



우연히 들어간 서울 뒷골목 분식집에서 라면 맛을 본 것이다. “너무 맛있어 꼭 노르웨이서 라면사업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50세가 되던 80년대 중반 라면사업을 시작했다. 오랜 현지 요리사 경력을 토대로 노르웨이인 입맛에 맞는 소스를 개발했다. 한국의 한 라면회사에 ‘미스터 리’라면 생산을 의뢰했다.



3년 간 음식점 등을 돌며 라면 홍보에 나섰다. 처음엔 냉담했다. 그러나 그의 줄기찬 노력에 노르웨이인들의 입맛이 돌아서기 시작했다. 주문이 급속히 늘었다. 현재는 노르웨이 인구(450만명) 대부분이 라면을 즐겨 먹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면 시장 점유율은 80%.



◆천안의 기억=13세 때까지 기억이 전부다. 당시 중심가였던 봉명동에서 살았다. 네살 위 형(이명호·76)은 당시 천안농고 학생이었다. “매번 형의 옷을 물려 받아 새 옷을 입어 본 기억이 없다. 부모님은 나를 중학교도 보내지 않으려 했는데 할머니가 돈을 줘 시험을 치고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해 6·25가 일어나 결국 중학교는 다니지도 못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대한 추억은 생생하다. 친구들과 철길을 건너 지금의 천안초등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그는 사별한 독일인 첫 아내와의 사이에서 딸 셋을 뒀다. 이름은 안자(42·의사), 선자(38·요리사), 용자(33·기자). 노르웨이에선 한국이름 첫 자를 따서 아냐·소냐·이리나로 부른다.



이번 한국행에 10년여 만에 이리나가 동행했다. “나와 형님이 죽어도 사촌끼리 혈육의 정을 잊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이씨는 조카 형제인 이한배(48·서적판매업·천안 와촌동)씨와 이한선(46·한나라당 충남도당 인권위원장) 변호사 가족과 자신의 딸들이 서로 연락하며 살기를 원한다.



이날 이씨는 딸 이리나를 데리고 조카들과 함께 천안 광덕 공원묘지로 부모 성묘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세 딸로 하여금 아버지 고향이 한국 천안임을 분명히 기억하게 하고 싶다.



◆한국-노르웨이의 가교=유엔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 트리그브 리(Trygve Lie, 1946년2월~1953년4월)가 살던 집은 이씨 하숙집 바로 옆에 있었다. 그는 유엔군의 한국전 참전을 이끌어낸 사람이었다. “그는 어린 나에게 ‘너와 나는 성이 리(Lie)로 같다’며 친 자식처럼 대해줬다”며 “지금껏 그의 가족들과 각별하게 지낸다”고 말했다. 노르웨이는 6·25때 의료진 600명을 파견했다. 이씨가 목숨을 건진 것도 그 덕이었다. 그는 30년 가까이 노르웨이에서 한국 참전 의료인 가족 초청 행사를 열어 보은하고 있다.



그는 인천에서 ‘리틀 노르웨이’건설 사업을 착수했다. 노르웨이 근해에서 잡은 연어·대구·고등어·골뱅이를 가져와 저렴한 값에 한국에 팔려고 한다. 노르웨이엔 ‘리틀 코리아’를 열 계획이다.



조한필 기자, 사진=조영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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