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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비관론자들을 위한 변명

도박과 투기를 좋아하는 민족으로 으레 중국인을 꼽지만 한국인도 못지않다. 어떤 점에선 더하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은 지난해 도박 중독으로 생활에 문제가 생긴 비율(9.5%, 359만 명)이 세계 1위란 보고서를 내놓았다. 온라인 도박이 가장 성행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한방’ ‘인생역전’ ‘도 아니면 모’란 말이 표준말처럼 들릴 정도다. 문제는 이런 기질이 금융시장에서도 곧잘 발휘되곤 한다는 거다. 증권 시장이 좋은 예다.

중국인들은 황소만 사랑한다. 황소(bull)는 증시에서 활황을 뜻한다. 상하이 증권거래소 로비에 들어서면 돌진하는 황소 조각상이 방문객을 맞는다. 침체를 의미하는 곰(bear)은 아예 없다. 선진국 증권거래소에선 대개 곰과 황소가 팽팽히 대치하고 있는 것과 딴판이다.

한국은 한 술 더 뜬다. 여의도 한국거래소 로비에 곰이 있기는 있다. 다만 무참히 황소에 짓밟히고 있다는 게 다를 뿐이다. 황소의 치받은 뿔에 속절없이 자빠지는 곰의 표정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세계 주요 거래소의 곰과 황소 상 중 이렇게 일방적으로 곰이 당하는 곳은 한국뿐이라고 한다. 그뿐이랴. 거래소 신년 하례식에 초대받는 것도 황소뿐이다. 그만큼 상승장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는 의미다.

그러다 보니 한국 증시에서 비관론자로 살아가기는 무척 힘들다. “당신 회사 주가가 떨어질 거요” 하면 우선 기업들이 싫어한다. 덩달아 비관론자를 고용하고 있는 증권사 경영진의 시선도 곱지 않아진다. 주요 고객인 기업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영업에도 보탬이 안 된다. 주가가 오른다고 해야 손님을 많이 꾈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몇 건씩 쏟아지는 한국 증권사들의 보고서에 주식을 ‘팔라’는 내용은 1년에 잘해야 한 번꼴인 것도 그래서다.

몇 안 되는 비관론자로 꼽히는 HMC투자증권 이종우 리서치센터장도 애초 본인이 원한 건 아니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스스로는 ‘합리론자’ ‘중간론자’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세상의 시선은 다르다. 이 땅에서 비관론자 소리를 안 들으려면 시장을 보는 눈이 냉정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내일 증시가 100% 곤두박질할 것으로 확신해도 오늘은 “괜찮다”고 얘기할 수 있어야 ‘정상’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가 신입사원 시절 선배에게 들은 충고도 그랬다. “(국내 애널리스트가 시장을 전망할 때) 결론은 하나다. ‘내일 전쟁이 나도 주가는 오른다’는 것이다.”

그는 이달 초 자신의 올해 주가전망이 틀렸다고 고백했다. 중국 변수를 너무 작게 봤고, 세계 각국 정부가 푼 돈의 힘을 너무 무시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비관론자로 꼽히는 김학균(한국투자증권 연구위원)씨도 비슷한 말을 했다. “(주가가 하락할 것이란) 전망이 틀려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했다. “시장이 떨어진다고 봤는데 오르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무섭다”는 말도 덧붙였다. 반발과 질타가 쏟아지고 심하면 옷을 벗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에선 이를 두고 ‘비관론자의 항복’이라고 불렀다. 혹자는 최후의 비관론자들이 사라졌다는 말도 했다.

이후 시장은 낙관으로 가득 찼다. 주가지수가 1700선을 넘나들자 주요 증권사들은 어제 대부분 연말 지수 전망을 끌어올렸다. 1800은 물론, 1900선을 내다보는 곳도 나왔다. 연초엔 1400선이면 높은 편이었고 1150을 전망한 곳도 있었다.

어제는 마침 한국 증시가 숙원을 푼 날이다. 파이낸셜타임스 스톡익스체인지(FTSE) 선진국지수에 들어간 것이다. 아직은 덩치도 비중도 작지만 의미는 크다. 우리 증시가 그만큼 선진화했다고 세계가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선진 증시의 특징 중 하나는 비관론자들이 더 대접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굳이 선진증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 증시에 비관론자가 존재해야 할 이유는 많다. 무엇보다 비관론자가 사라진 증시는 ‘브레이크 없는 벤츠’와 같다. 곰이 사라지면 황소들만 득실대게 마련이다. 그리고 대개 개미투자자들이 큰돈을 잃는 사고는 황소천하에서 일어났다.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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