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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유적 훼손 안 된다” … 폭격 취소한 장제스

중국 톈진시의 무장경찰들이 건국 60주년을 앞두고 시위 등 사회 소요에 대비한 특수 훈련을 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발생하기 시작한 중국의 집단시위는 이미 연 10만 건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톈진 로이터=연합뉴스]


중국이 1949년 10월 1일을 건국일로 잡은 건 스탈린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다. 그해 7월 소련을 비밀리에 방문한 류샤오치(劉少奇) 부주석 등 중국 대표단은 스탈린을 만나 “국공내전을 마무리 짓고 새해 첫날(1950년 1월 1일)을 건국일로 선포하겠다”는 계획을 알렸다. 스탈린은 반대했다. 내전은 4년 동안 이어졌고 무정부 상태가 계속되면 외부의 적에게 기회를 줄 수 있으니 실기하면 안 된다는 논리였다. 결국 당초 계획보다 3개월 앞당겨 건국 행사가 치러졌다.

중국 10월 1일 건국일 뒷얘기



장소 선정도 우여곡절이 따랐다. 국민당군의 공습 가능성이 문제였다. 천안문(天安門) 광장과 시위안(西苑) 비행장 두 곳을 놓고 엎치락뒤치락했다. 중국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천안문 광장만 한 장소는 없었지만 공습에 취약해 고심을 거듭했다. 결국 행사를 며칠 앞두고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천안문 앞이 좋다”고 결정을 내렸고 다른 지도부 인사들이 동조했다.



공산당 지도부가 두려움에 떨었던 베이징 폭격 문제는 실현 가능성이 컸던 작전이었다. 열병식 행사에 참가한 인민해방군 전투기들이 완전 무장 상태로 시범 비행에 참가했을 정도였다. 행사 당일 새벽 장제스(蔣介石)는 베이징 공습 작전 승인 문제를 놓고 장고(長考)에 빠졌다. 출격 명령을 재촉하는 공군 측 전화가 수차례 울렸지만 “기다리라”는 명령만 거듭 내릴 뿐이었다. “더 늦으면 제때에 베이징을 폭격할 수 없다”는 최후 보고가 전달되자 장은 “작전 취소”를 명령했다. 베이징의 문화 유적을 훼손하는 역사의 죄인이 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공습에 대비해 오후 늦게 시작된 건국 선포식은 28회의 축포와 함께 시작됐다. 공산당이 창당 28년 만에 집권에 성공했다는 의미였다.



정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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