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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자유인을 기르겠다” 배재학당 세운 아펜젤러의 꿈

아펜젤러가 부인과 함께 아들을 안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모습(사진=유영익 저 『이승만의 삶과 꿈』).
“우리는 부활절에 이 땅에 왔다. 이날 죽음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나라의 민초들이 얽매어 있는 굴레를 끊으시어 하나님의 아들딸이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1858~1902)가 제물포에 첫발을 디딘 1885년 4월 5일에 올린 기도다. 그는 조선 사람들에게 다음 생에 누리는 영생만이 아니라 미국인이 누리는 자유를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서 누리게 하고픈 소망을 품고 있었다.

“어떤 이는 미국의 정치가 화평하고 민간사업이 번성하는 것은 종교와 무관하다 한다. 그러나 근원을 소급하면 그 교화에 의하지 않음이 없다. 동양제국이 야소교(예수교)를 신봉치 아니하면 구미 각국과 같이 존립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미국을 둘러본 박영효의 소감처럼 그때 개화파 정객들은 기독교를 나라의 부강을 이끌어내는 종교로 바라보았다. 김옥균이 1883년 7월 서울에 온 매클레이 목사를 도와 기독교 학교와 병원을 세워도 좋다는 고종의 윤허를 받아냈기에 아펜젤러는 숨어 들어와 순교의 붉은 피를 뿌린 천주교 사제들과 달리 합법적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

김옥균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의 여파로 중국이 조선의 독립은 물론 세상을 알기 위한 교육의 기회마저 주려 하지 않던 암흑의 시절. 1885년 8월 3일 4명의 학동으로 시작한 배재학당(培材學堂)은 10여 년 뒤에는 ‘배재대학’으로 불릴 만큼 성장했으며, 불의의 해난 사고로 아펜젤러가 숨을 거둔 1902년까지 길러낸 인재는 500명 이상이었다.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 그때 배재학당은 이 땅 젊은이들의 굳은 머리를 녹여 백성이 주인 되는 세상을 꿈꾸는 근대 개혁가나 사상가로 거듭나게 한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였다. 그는 협성회회보·매일신문의 발간과 독립협회의 활동을 도와 자유와 인권이란 근대 가치가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 널리 퍼지게 도왔을 뿐 아니라, 미국 정부와 선교본부의 지시를 어기고 서재필·이승만·윤치호 같은 근대화 운동가들을 박해의 칼날에서 지켜준 방패였다.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서 긴 잠에 든 그의 삶은 한 세기 전 우리를 오랜 미몽에서 깨어나게 한 한줄기 빛이자 희망이었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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