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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극 칼럼] 코레아 우라

보통사람인 우리는 일상에 묻혀 살기 때문에 꼭 기억해야 할 것을 잊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명절 때가 되면 제사라는 형식을 통해 잠시나마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의 덕을 기리고 생각한다. 우리는 ‘나라’라는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지만 보통 때는 그 나라를 잊고 산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 꼭 100년이 되는 올해,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이 지난주 안중근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현지에서 세미나를 열었다. 당연히 잘 안다고 생각했던 안중근이었지만 그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그를 너무 몰랐고, 그를 잊고 살았던 내가 부끄러웠다.

일제의 침략 증거로 보존되고 있는 뤼순 감옥에는 안 의사가 갇혔던 독방, 교수형 당한 집행실 등이 남아 있다. 그는 사형 전날 두 동생에게 최후의 유언을 했다. “내가 죽은 뒤 내 뼈를 하얼빈 공원에다 묻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 국권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 독립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의 무덤이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한 일제는 시신을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고 감옥 공동묘지에 몰래 매장했다. 중국 정부는 집단 매장된 중국인 희생자들을 발굴하여 해골과 뼈가 남은 나무통 관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안 의사의 시신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공동묘지 자리에는 아파트 건축이 한창이어서 붉은 감옥 담장 밖으로 크레인 머리들만 보였다.

-그렇게 원하시던 국권은 회복되고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천국에서 승리의 만세를 부르실 당신을 그려 봅니다. 그런데도 저희는 당신의 시신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병사의 시신조차도 끝까지 찾기 위해 애쓰는 나라들을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관동도독부 재판청사도 보존되어 있었다. 그는 테러리스트가, 살인자가 아니었다. 그는 공판에서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대한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한 것이 아니오.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 자격으로 조국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니 만국공법(국제법)으로 처리토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고종을 폐위시키고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시킨 이토의 죄악 15개 조목을 밝혔다. 이 재판을 참관한 영국의 그래픽지 기자는 “이 세계적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고 보도했다.

-스스로 한 명의 의군(義軍)이 되어 희생을 택하신 당신은 3000만을 의군으로 만들었습니다. 왼손 무명지를 잘라 그 피로 ‘대한독립’을 썼던 당신은 글씨마다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과 함께 무명지 없는 왼손을 낙관 대신 찍었습니다. 당신의 간절한 소망은 대한국인, 즉 대한의 국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당신이 그렇게도 원했던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습니다. 이 국민 됨을 모두가 소중히 여기며 살겠습니다.-

하얼빈역은 혼잡했다. 안 의사가 저격했던 곳은 지금 1번 플랫폼이 되었다. 저격한 장소와 이토가 쓰러진 자리는 단지 색깔 다른 타일 한 장이 깔려 있을 뿐 작은 기념 동판조차 없어 모두 무심히 밟고 지나갈 뿐이었다. 안 의사는 저격 후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삼창하고 순순히 체포됐다. 현장에 있었던 러시아 사진사는 “안중근은 놀랄 만큼 침착했다”고 진술했다. 홍콩의 화자일보(華字日報)는 “생명을 버리려는 마음을 가졌기에 그의 마음은 안정되었다. 마음이 안정되었기에 손이 안정되었다. 손이 안정되었기에 탄알이 명중하였다”(1909년 11월 9일)고 썼다.

-물맷돌 하나를 들고 거인 골리앗 앞에 선 소년 다윗을 생각합니다. 그는 골리앗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떨리는 손이었다면 그의 이마를 명중시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의 손도 떨리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위해 옳은 일을 한다는 확신이 당신을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그 용기를 배우고 싶습니다.-

여행 마지막 날 저녁 회원들은 각자의 소회를 밝히는 기회를 가졌다. 한 여성이 “언제부턴가 나는 심장은 뛰지만 가슴이 뛰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제 가슴이 다시 뛰는 것을 느낀다. 한 어머니로서 나는 안 의사 어머니를 생각했다”고 했다. 안 의사 어머니는 사형 판결 소식을 듣고 “옳은 일을 했으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大義)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며 상고를 포기케 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그 사실을 보도하면서 시모시자(是母是子, 그 어머니에 그 아들)라는 글을 실었다.

일상에 다시 묻혀 살아야 할 우리,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대한민국을 생각하며 돌아왔다.

문창극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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