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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28> 후스와 장제스<下>

후스의 부인 장둥슈(江冬秀)는 전족을 한 문맹이었지만 친정은 진사를 줄줄이 배출한 안후이의 명문망족이었다. 후스·장제스·쑹메이링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집안이 번듯했다.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후스와의 인연도 시작은 우연이었다. 14세 때 하인들 거느리고 장보러 나갔던 모친이 평소와 다르게 빈손으로 돌아왔다. 총기가 넘치는 미소년을 발견했다며 집안이 떠들썩했다. 중간에 사람을 넣어 통혼을 청했다는 말을 들었다.

남편이 관청의 문턱을 밟기는 했지만 대대로 내려오는 소금장사 집안 주제에 더할 나위 없는 혼처였지만 후스의 모친은 주저했다. 장은 호랑이 띠였다. 안후이 사람들은 남편 장악력이 탁월하고 사납다는 이유로 호랑이 띠 여자들을 기피하는 습속이 있었다. 장의 모친은 집요했다. 사주 보는 사람을 매수해 놓고 사주팔자라도 맞춰보자며 후씨 집안 사람들을 2년간 설득했다. 후의 모친은 사주쟁이의 말을 듣고서야 정혼(訂婚)을 수락했다. 아들의 의견 같은 것은 들을 필요가 없었다. 장둥슈는 20리 떨어진 곳에 사는 한 살 아래 짜리 애가 남편이거니 했다. 후스도 마찬가지였다. 모친의 결정은 황제의 성지(聖旨)나 다름 없었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여자애와 정혼한 후스는 상하이에 나가 학업을 계속했다. 19세 때 관비유학생에 뽑혀 미국 유학을 떠났다. 후가 없는 동안 장둥슈는 혼자 사는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펭귄처럼 뒤뚱거리며 11년간 20리 길을 오갔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후에게 편지도 가끔 보냈다. 후스는 아무리 들여다 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편지를 여러 통 받았다.

1917년 5월 후스는 7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베이징대에 최연소 교수로 부임했다. 신문화 운동을 주도하고 문학혁명과 백화문 사용을 제창해 하루아침에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그해 겨울 고향에 내려와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의 결혼은 민국시대의 7대 사건 중 하나였다. 연애와 이혼의 자유를 주장해 청년들을 열광케 한 민주와 과학의 신봉자가 전족을 한 촌부인과 베이징 거리를 산책하며 군것질하는 모습은 모순의 결정체였다. 좀 배웠다 하면 자신이야말로 봉건적 혼인제도의 희생자라며 머리를 쥐어뜯던 시대였다. 마오쩌둥·루쉰·장제스 할 것 없이 스승의 딸, 제자, 외국인 회사 경리직원 등과 눈이 맞아 부모가 맺어준 부인을 버리고 새로운 가정을 꾸렸지만 후스는 운명을 받아들였다.

후스는 민국 4대 미남 중 한 사람이라 불릴 정도로 용모가 준수했다. 미국인·중국인 할 것 없이 여자 친구가 많았다. 연애편지를 수없이 주고받았다. 부인이 문맹인 덕에 불화가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단 한번 이혼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장둥슈는 “좋다. 그 전에 할 일이 있다”며 주방에 들어가 식칼을 들고 나왔다. “애들도 죽여버려야 관계가 정리된다”면서 두 아들이 자는 방으로 향했다. 기겁을 한 후스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싹싹 빌었다. 겨우 용서를 받았다.

후스는 세상을 떠나기 전 우스갯소리로 남자들이 준수해야 할 삼종사덕(三從四德)을 얘기한 바 있다. “부인이 외출할 때 모시고 다녀라. 명령에 복종해라. 부인이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해도 맹종해라”가 삼종이었다. “부인이 화장할 때 불평하지 말고 끝날 때까지 기다려라. 생일을 까먹지 마라. 야단 맞을 때 말대꾸하지 마라. 부인이 까먹는 돈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며 사덕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후스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천하의 장제스도 집안에만 들어오면 후스와 처지가 비슷했다. 미국 유학을 마친 외국인 회사의 경리직원 쑹메이링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상하이의 화류계를 휩쓸고 다녔다. 화류병 때문에 병원 드나들기를 밥 먹듯 했지만 쑹을 본 후부터 다른 여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온갖 유치한 짓을 동원해 결혼에 성공하자 생활 방식도 변했다. 먹기 싫은 와인을 억지로 마시기 시작했고 포크와 나이프 쓰는 법도 익혔다. 얼떨결에 기독교를 믿겠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며 간증도 했다. 평소 알던 사람들이 보기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1962년 2월 24일 후스는 중앙연구원에서 거행된 연회 도중 갑자기 심장발작으로 숨을 거뒀다. 장제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신 문화 중 구 도덕의 모범, 구 윤리 중 신 사상의 사표”라는 만련(挽聯)을 영전에 선사했다. 장제스는 후스를 가장 정확히 이해한 사람이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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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