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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는 언제 어디서나 … 뜬구름 잡는 얘기도 OK

삼성전자 수원사업장내 VIP센터에 모인 LFD(Large Format Display, 정보표시 대형모니터) 프로젝트 팀원들이 이색적인 복장으로 아이디어를 모으던 중 잠시 포즈를 취했다. [삼성전자 제공]

#1. 2007년 1월 2일 삼성전자 생활가전사업부의 개발·디자인·상품기획 쪽 직원 50여 명은 비장한 각오로 경기도 수원사업장에 모였다. 입소한 곳은 일반엔 생소한 이름의 ‘VIP센터’. 최대 시장인 미국을 공략하기 위해 차출된 드럼세탁기 관련 요원들이었다. 일명 ‘퍼플(Purple)’ 프로젝트. 소비자 조사결과 2층 목조주택에 많이 사는 미국인들은 위층에 세탁기를 설치해도 진동과 소음이 아래층에 전달되지 않는 점을 중시했다. 개발팀은 ‘볼 밸런스’라는 기술을 개발해냈다. 드럼의 앞뒤로 철제 볼이 들어간 링을 넣어 빨래가 한쪽으로 쏠릴 때 볼들이 그 반대로 향하게 해 세탁기의 진동과 소음을 10분의 1 이하로 줄였다. 한 번에 많은 양의 빨래를 돌리는 미국인들의 생활습관까지 반영해 17㎏급의 큼지막한 ‘퍼플’ 세탁기가 탄생했다. 이 제품은 지난해 3월 미국 시장에 출시한 이후 큰 반향을 일으키며 현지 드럼세탁기 판매량을 두 배 이상으로 늘렸다.

#2. VIP센터는 ‘귀빈(Very Important Person)’의 준말이 아니라 ‘가치 혁신 프로그램(Value Innovation Program)’을 뜻한다. 이 센터 1동 4층에 있는 ‘과제룸’은 구조가 특이했다. 실내로 들어가는 복도의 벽에는 짚신과 고무신이 천장을 향해 올라가는 듯한 모양으로 잔뜩 붙어 있었다. VIP센터의 김동준 부장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으로 뛰어넘으라는 뜻을 담은 인테리어”라고 설명했다. 안에 들어가 보니 온통 낙서투성이의 벽 때문에 어지러웠다. 여기서 낙서는 절대 권장사항이다. 낙서하라고 거울·화이트보드·테이블을 곳곳에 배치하고 여기저기에 매직펜이 널려 있었다.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오면 만화가를 종종 초빙해 생각을 형상화한다. VIP센터가 1998년 처음 세워졌을 때만 해도 “들어올 땐 자유지만 나갈 땐 자유가 아니다”라는 농이 오갈 정도로 분위기가 빡빡했다. 프로젝트를 해결해야만 센터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분위기를 바꿨다.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가 창조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데 적합하다고 보고 알아서 출퇴근하도록 했다. 여기 들어온 사람들은 처음 1주일 동안 ‘CFT(Cross Functional Team)’란 활동을 한다. 낯선 이들끼리 안면을 트는 과정이다. 이동진 VIP센터장(상무)은 “배가 산으로 가지 않으려면 열린 마음자세가 중요하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 황당한 듯한 이야기라도 툭툭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3. 삼성전자는 한국의 간판 글로벌 기업이다. 메모리 반도체와 TV 시장에서 세계 1위다. 휴대전화 시장에서도 1위를 넘본다. 이런 위치에 이르기까지 VIP센터 같은 ‘창조경영’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자평이다. 애니콜·파브·센스Q·지펠·하우젠·프린터복합기·옴니아폰 같은 히트상품들이 VIP센터에서 탄생했거나, 원가경쟁력을 갖췄다. 이곳은 보르도TV의 산실이기도 하다. 2006년 출시 후 삼성 TV를 세계 1위에 올려놓은 공신이 됐다. VIP센터는 기숙사로 쓰인 5층 건물 3개 동을 개조해 사용 중이다.

당시 윤종용 부회장의 뜻에 따라 설립된 이 센터의 당초 주 역할은 원가절감이었다. 이후 소극적으로 비용을 줄이는 일을 넘어서, 생산기술연구소 소속으로 고부가가치 혁신 상품을 만들어내는 장으로 변모해 왔다.

#4. VIP센터에 들어오는 직원들은 주로 상품기획·회로개발·소프트웨어·개발기획·디자인 부서 등 출신이다. 평소 만나기 어려운 다양한 분야 직원들을 한데 모은 것이다. 각 부서 팀장들은 ‘소속 팀원이 프로젝트를 완전히 끝낼 때까지 업무에 복귀하지 않아도 좋다’는 서류에 서명해야 한다. VIP센터에서 만난 한 연구원은 “각자가 자기 분야를 대표해 온 만큼 방관자는 없다”고 전했다. 회의 때면 그만큼 밀도 있는 논의가 오간다. 업무협의가 필요하면 관련 당사자들끼리 자율적으로 만난다. 디자이너의 생각이 곧바로 옆자리의 엔지니어에게 넘어가 검증을 받을 수 있다. 아이디어를 구하려고 영화를 보는 것도 물론 자유다.

대신 VIP센터 소속 가치혁신 전문가가 정해주는 일정과 틀은 있다. 프로젝트는 한 달에 끝나기도, 1년 이상을 끌기도 한다. VIP센터에선 컴퓨터 지원 엔지니어, 모듈 디자인, 기기 엔지니어, 품질 등 분야의 전문가를 프로젝트 고비고비에 참여시켜 신속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동진 센터장은 “애플 아이팟처럼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제품 여럿이 이곳에서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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