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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미당·황순원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⑨

노시인의 해학, 흙에서 여인을 느끼다

시-정진규 ‘씨를 뿌리다’ 외 33편




어제는 뒷밭에 播種을 했다 씨를 뿌렸다 씨 뿌리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좋은 그림 하나 그려서 옛날 마을 이발소에도 걸려 있고 싶었다 폭신한 흙을 만지는 시간이 뿌리는 시간보다 길었다 황홀한 외도여, 저리는 오금이여, 새 여자의 몸을 탐하는 이 슬픈 속 사정을 한창인 뒷문 밖 살구꽃이 분홍빛으로 더욱 부추기었다 범부채, 개미취, 금계, 채송화, 해바라기, 쪽도리꽃, 아주까리, 상추, 치커리들 무더기로 다 뿌리고 나서도 이 나의 代理播種이 不倫이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새싹 돋아 실하게 되면 모종을 집집마다 나누어 드릴 작정이다 入養시킬 작정이다 장하시다고 回春하셨다고 모두 끼끗하다고 칭찬 받을 작정이다 -‘시안’ 2009년 여름호





정진규(70·사진) 시인은 지난해 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경기도 안성의 생가로 내려갔다. 선친의 명에 따라 조상의 묘를 한곳으로 모시고 묘지기 노릇을 하러 간 게다. 시인은 “조상음덕을 받았다”고 했다. 아침마다 묘를 한바퀴 도니 운동이 절로 돼 건강이 좋아졌다. 시는 더 말할 것 없고.



“그동안 자연을 안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겉만 알고 속내는 몰랐던 거요.”



농사 짓고 흙을 만져보니 자연의 ‘당길심’이 대단했다.



“심어놓고 한번 들여다 본 것과 두번 들여다 본 게 달라요. 이파리나 열매로 섬세하고 조밀하게 표현해요. 저를 위해, 지가 잘 살려고 그런다고. 그 전엔 자연이 인간에게 베푸는 것으로만 알았지….”



‘씨를 뿌리다’는 그런 자연의 당길심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시다. 폭신한 흙은 사랑하는 여인의 살을 만지는 듯한 관능으로 다가와 시인의 노동과 땀방울을 재촉한다. 나비가 꽃을 탐하는 장면을 보듯, 화끈거리진 않아도 발그레해지는 시다.



권혁웅 예심위원은 “귀향 후 더욱 생생하고 깊어진 시편들에서 정진규식 어법의 완성과 변화를 동시에 맛볼 수 있다”고 평했다.



이경희 기자



◆정진규=1939년 경기도 안성 출생. 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말씀의 춤을 위하여』 『몸詩』 『알詩』 『도둑이 다녀가셨다』 『本色』 『껍질』 등. 월탄문학상·공초문학상·불교문학상 수상.












쉰 살에 그린 열아홉 눈보라 같은 사랑

소설-은희경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열아홉이 어떤 나이였더라. 은희경(50·사진)씨는 소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문학동네’ 2009년 여름)에서 열아홉의 낭만적 사랑과 불안, 죄의식을 그린다.



바닷가 도시에서 서울의 학원으로 대입 막바지 정리 강의를 들으러 올라온 열아홉 안나. 서양에서 온 크리스마스 카드 속의 사내아이와 닮은 요한은 그녀의 가슴을 콩닥이게 한다. 그러나 그는 안나의 단짝이자 안나보다 예쁘고 무용을 잘 하는 루시아의 남자친구가 됐다. “하느님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잘못 포장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그랬다.”



셋이서 함께 보내기로 한 십대의 마지막 크리스마스 이브. 명동의 약속 장소에 루시아가 나타나지 않는다. 오랜 기다림 끝에 안나와 요한은 눈 오는 거리를 둘이서 걷는다. “이런 순간이라면 마치 탬버린 소리가 울려퍼지듯 목성과 화성과 명왕성에도 눈이 마구마구 쏟아지고 있을 것이라고.” 1976년의 겨울 이야기다.



“중견이 19세의 감성을 그릴 수 있을까, 라는 질문도 포함되는 작업이었어요. 요한과 걸으려는 순간, 내가 써놓고도 가슴이 벅찼어요. 재능이 없는 건 아니구나 싶어 기뻤죠.”



은씨의 작품을 놓고 심사위원들은 “초기 은희경으로 되돌아갔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초기작이 낭만적 사랑에 대한 조롱과 냉소에 가까웠다면, 이번 작품은 조금 더 무겁고도 아름다워졌다”는 평이었다.



“소설에 괜찮은 남자, 예쁜 여자를 잘 안 썼어요. 사실성 있는 것만 하겠다면서…. 그것 자체가 경직되고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판타지, 달콤한 것도 담게 됐나봐요.”



소설에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는 그림 하나, 시 한 수가 있다. 오스카 코코슈카의 그림 ‘바람의 신부’와 단편 제목을 따온 사이토 마리코의 시 ‘눈보라’. 두 작품에 대한 궁금증을 던져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소설이다.



이경희 기자



◆은희경=1959년 전북 고창 출생.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타인에게 말걸기』, 장편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등. 동인문학상·이산문학상·한국일보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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