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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시시각각] 강남 좌파를 춤추게 하라

산업화 초기부터 지식인들 사이에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던 영국에는 ‘샴페인 사회주의자(Champagne Socialist)’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아하게 샴페인 잔을 기울이면서 사회주의 또는 진보적 가치를 논하는 유한계층을 말한다. 영국에 샴페인 사회주의자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캐비어 좌파(Gauche caviar)’가 있다. 고급식당에서 캐비어를 즐기면서 진보적 좌파의 가치를 열렬히 주장하는 사람들을 이른다. 이들은 스스로 진보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제공하는 온갖 편익과 지위를 마음껏 누린다. 우리나라에서는 ‘강남좌파’가 여기에 딱 맞는 표현이다. 서울 강남이 상징하는 부와 지위를 누리면서 동시에 진보·좌파적 성향을 가진 계층이다.

샴페인 사회주의자나 캐비어 좌파란 표현은 당초 우파가 좌파의 가식적 행태를 비아냥거리기 위해 만들어낸 말이다. 자신들의 이념이나 가치관과 배치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가증스러움을 꼬집은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유럽에서 좌파에 대한 이런 식의 조야한 음해는 찾아보기 어렵다. 세련된 신사의 이미지를 뽐내는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나 파리의 최고급 주택가에서 여유 있는 삶을 즐기는 리오넬 조스팽 전 프랑스 총리를 두고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강남좌파는 여전히 비아냥의 대상이다.

만일 국회 문을 부수고 돗자리 농성을 벌이던 야당 의원들이 고급 리무진을 타고 주말골프를 즐긴 사실이 드러나면 과연 어떨까. 아마도 그 가증스러운 행태를 두고 비난을 넘어 망신을 주기 십상이다. 실제로 지난 연말연시에 해외 골프여행을 다녀온 일부 야당 의원이 한동안 곤욕을 치렀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국회의원쯤 한다면 기사 딸린 고급승용차를 타고 품위 있는 생활을 한다고 해서 뭐랄 것은 없다. 그런데도 한사코 그런 실상을 인정하려 하질 않는 이유는 이중잣대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좌파는 유럽에서 우파가 덧씌운 고정관념을 스스로 뒤집어쓰고 그 이율배반적인 결과에 당혹스러워한다. 서민을 위한다면서 고급음식점에 가기가 겸연쩍고, 노동자를 위해 투쟁한다면서 해외여행 가기가 면구스러운 것이다. 이런 이중적 태도와 가치관의 혼란은 지난 정권에서 한자리를 꿰차는 바람에 갑자기 생활이 풍족해진 재야운동권 출신 인사나, 늘어난 정부 지원금과 후원금 덕에 홀연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즐기게 된 문화계 인사, 참교육을 외치면서 자식을 해외로 유학 보낸 전교조 교사들 또한 다르지 않다. 이들에게는 지금 누리는 지위와 풍요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현실적 욕구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죄책감이 수시로 교차한다.

이러한 이중성은 더욱 거친 투쟁적 이미지와 과격성으로 표출된다. 점잖은 국회의원이 해머와 전기톱을 들고, 연봉 1억원이 넘는 사람이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투사로 돌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의식과 현실의 간격은 더욱 커지고 대중의 공감과 지지는 더욱 멀어지니 딱한 노릇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일찍이 “존재가 의식을 구속한다”고 했다. 한국의 강남좌파는 이런 마르크스의 명제를 철저히 부정한다. 존재와 의식이 완전히 따로 놀고 있으니 말이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이 괴리를 현명하게 해소할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 유민기념강연회에 참석한 리오넬 조스팽은 두 가지 변화가 공존의 길을 열었다고 했다. 하나는 혁명 대신 점진적 개혁을 택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비에트 공산주의와 결별한 것이다. 일단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면 좌파라고 해서 자본주의의 과실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한국적 상황에 대입해 보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분명히 인정하고 종북주의와 확실히 결별하는 것이다. 그런 연후엔 좌파라고 해서 굳이 궁핍한 생활을 고집할 것도 없고 극악스럽게 ‘투쟁’할 일도 없다. 당당하게 강남좌파임을 내세우고 물질적 풍요와 진보적 가치를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길은 있다.

김종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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