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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하루 연장 … 북한 ‘방북 보따리’ 성에 안 찼나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면담일정을 잡는 문제를 놓고 평양의 분위기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두 사람 간의 만남이 유력했던 11일 오후 북한 관영매체에서는 결국 아무런 보도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밤늦은 시간 평양 백화원 초대소(지도)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현 회장 측은 서울의 현대아산에 국제전화를 걸어 “방북 일정을 하루 더 연장하기로 했다”고 알려왔다. 현 회장의 김 위원장 면담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현대 측과 정부 당국은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자칫 면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에서다.

하지만 평양까지 불러들인 만큼 어떤 형태로든 두 사람의 상봉이 이뤄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일정을 연장한 것도 어떻게든 김 위원장 면담을 성사시키려는 현대와 북한 당국의 뜻이 반영된 움직임이란 얘기다.

현 회장과 김 위원장의 만남이 난항을 겪고 있는 가장 유력한 이유는 일정 조율 때문으로 보인다. 현지지도나 내부 행사 같은 김 위원장의 통치 일정이 11일 면담을 어렵게 했을 수 있다. 지방에 있는 공장·기업소나 군부대를 방문하고 귀환 일정이 여의치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김 위원장의 건강 문제가 발목을 잡았을 수도 있다. 오찬이나 만찬에 이어 면담시간까지 포함하면 통상 3시간 안팎의 만남을 가져야 하는 김 위원장으로서는 컨디션 조절이 필요하다. 건강이 아직 완전한 상태가 아닌 김 위원장은 지난 4일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과도 북·미 관계에 대해 장시간 대화를 했었다.

현 회장의 방북 협의를 놓고 북한 권력 내부에서 입장 조율이 덜 끝났기 때문이란 진단도 가능하다. 억류 중인 개성공단 근로자 유모씨를 조사 중인 공안 당국이나 금강산 관광 재개를 결정해야 할 군부 등의 입장 차이가 나타났을 것이란 얘기다.

현 회장 측이 들고 간 방북 보따리가 북한의 기대에 못 미쳤을 수도 있다. 유씨 석방과 금강산·개성관광 재개, 개성공단 사업 정상화 등을 김 위원장이 큰 틀에서 보장해주는 장을 마련했는데 현대의 대북 상응 조치나 우리 정부가 건넨 대북 메시지가 성에 차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 차이가 10일과 11일 이종혁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등과의 사전 협의 과정에서 드러나 김 위원장과의 만남이 차질을 빚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북한 전문가들은 내놓는다.

일부에서는 김 위원장이 현정은 면담에 쏠린 여론의 관심을 의식해 몸값을 올리고 있는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남측에 대해 호락호락하게 유씨 석방이나 대북 경협사업 교통정리를 해주지 않을 것이란 사인을 보낸 것이란 분석이다. 한 당국자는 “클린턴 전 대통령 방북 때 당일 면담에 나서고 억류 여기자 2명을 귀환 비행기편에 함께 보냈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통일부는 현 회장의 일정 연장 배경을 다각도로 분석하면서 사태를 파악하느라 밤새 분주한 움직임을 보였다. 당초 10일부터 사흘간의 일정으로 방북한 현 회장 일행이 11일 김 위원장과 만찬을 겸한 면담을 할 것이란 일정이 유력했다. 만찬이 어려울 경우 평양을 떠나는 날 아침식사나 오찬을 해 극적인 상황을 연출한 경우도 있었다.

이번의 경우 이런 방식으로 일정을 잡기 어렵자 아예 하루를 연장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 것으로 정부는 보고 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정상회담 때는 서울 출발 날짜가 북측의 급작스러운 요청으로 하루 늦춰지는 등 김 위원장 관련 일정은 이런저런 이유로 변동을 겪는 일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순조롭게 방북 일정이 진행될 것으로 여겨졌던 상황에 차질이 생기자 정부 일각에서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도 나온다. 현 회장과 김 위원장의 만남이 불발될 경우 자칫 남북관계가 중대 고비를 맞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다. 8·15 이전 유씨를 송환토록 하려던 계획이 벽에 부닥치게 될 경우 사태는 꼬이게 된다. 다음 주에는 북한이 대북 군사도발 계획이라고 비난해온 을지연습이 예정돼 남북 간에 다시 긴장 국면이 조성될 수 있다. 당국자는 “12일 오후가 현 회장 방북 일정의 성패를 가름할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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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