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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적으로 파산한 한국의 보수

보수주의는 민족과 국가·종교·전통문화의 가치관을 유지 내지는 복원하고자 하는 이념이다. 19세기 유럽에서는 농업 중심의 장원경제에 기반을 둔 왕실과 귀족 그리고 이들의 보호를 받던 교회가 새로 부상하는 부르주아, 말 그대로 ‘도시에 사는 사람들’과 이들의 기반인 시장경제로부터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려고 만든 것이 보수주의였다. 그러나 산업화·도시화 후에는 사유재산제도와 자유시장경제를 통해 부와 권력을 획득한 ‘중산층’이 노동자와 도시 기층민의 권익을 지키고자 나선 사회주의 같은 좌파 이념에 맞서서 만든 것이 보수주의였다.

보수주의는 항상 경제적인 기득권을 옹호하는 이념이다. 이 때문에 자칫 이기적이고 차갑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보수주의는 기존의 경제체제만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공동체를 살맛 나게 해주는 가치관 역시 옹호하는 이념이다. 따라서 성공적인 보수정권은 항상 경제적 실리 외에도 국민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도덕·윤리·전통문화를 계승하면서 그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굴 수 있는 애국심 또는 민족주의에 호소한다.

미국 보수주의의 부활을 주도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철저한 시장주의자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린든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 등을 통해 급속히 팽창한 사회보장제도와 각종 재분배 정책 대신에 시장의 자율적인 작동을 보장하는 것이 오히려 미국을 부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시장주의 역시 지극히 미국적인 가치관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시장이야말로 미국인 특유의 개척정신과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해주는 가장 미국적인 제도라는 것이었다.

레이건의 ‘보수주의 혁명’이 가능했던 또 다른 이유는 시장주의에 사회적 보수주의(social conservatism)와 종교적 보수주의(religious conservatism)를 접목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의 월남전 반전운동, ‘성의 혁명’과 ‘여성해방’ 등을 거치면서 애국심이 해이해지고 전통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던 계층과 단체들을 규합한 것이다. 특히 가족제도를 보호하고, 종교적 신앙심을 되살리고,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는 낙태반대운동을 전개하면서 미국의 보수주의는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레이건은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데도 성공했다. 일본 제품 대신 미국 제품을 사는 것을 애국적인 행위로 고취하는 한편 소련과의 냉전을 자유·인권·민주주의를 위해서 ‘악의 제국’과 투쟁을 벌이는 ‘성전’으로 묘사하면서 미국민의 자긍심과 애국심을 한껏 고취시켰다.

고 박정희 대통령은 철저한 산업주의자였다. 그가 채택한 정책들은 농촌·농업 중심의 한국 경제를 하루아침에 도시·산업 중심의 체제로 바꿨다. 이 과정은 전통사회의 기반을 통째로 무너뜨리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잘살아보세’라는 구호로 전 국민이 이러한 ‘창조적 파괴’의 과정에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동참하게끔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그는 전통사회의 급속한 해체 속에서 무너져가는 전통적인 가치관과 정신세계를 보수하고자 노력했다. ‘정신문화연구원’을 만들고 세종대왕·이순신·퇴계·율곡·다산 등 역사 속 위인들의 업적을 기리는 사업을 적극 전개하면서 전통과 현대의 접목을 꾀하였다. 그리고 자주국방과 자주외교를 통해서 민족적 자긍심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는 자신의 정책이 파괴하기 시작한 농촌을 돌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산업화·도시화 과정에서 무시되고 피폐해지는 농촌이 자력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자 ‘새마을운동’을 주창했다. 선진공업국가의 기초를 다진 박 대통령이 농민들과 가장 가까웠던 지도자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박정희식 보수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오늘의 이명박식 보수주의는 어떤가? 시장주의와 실용주의는 분명 보수주의의 핵심적인 가치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전통적 윤리와 도덕을 지키고 전통문화와 애국심, 민족주의에 호소할 수 있을 때만이 한국의 보수주의는 되살아날 수 있다. 문제는 80~9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전통과 민족주의에 대한 담론은 진보 진영의 전유물이 돼버렸다는 사실이다. 어느덧 한국의 보수주의에게 남은 것은 시장과 실용밖에 없게 된 것이다.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은 한국의 보수가 지리멸렬하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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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