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세계를 매료시킨 ‘중공의 청춘’ 궁펑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선포식에 참석한 궁펑. 김명호 제공
궁웨이항(<9F94>維航)은 부모를 잘 만났다.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지만 딸들을 세인트 마리아 여자중학에 입학시켰다. 세인트 마리아 여자중학은 상하이의 명문이었다. 부유한 집안의 딸들이 아니면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학비가 비쌌다. 궁은 기숙사에 틀어박혀 책을 읽다 밥 먹는 시간을 놓치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깡통에서 과자를 꺼내 먹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궁의 부친은 딸에게 일주일에 한 번 비스킷을 한 통씩 사서 보냈다. 교장은 시도 때도 없이 “우리는 대사 부인들을 배양하는 학교가 아니다. 미래의 대사들이 이 안에서 나와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궁웨이항은 1933년 옌징(燕京)대학도 무난히 입학했다. 공산당에 가입해 황징(黃敬), 야오이린(姚依林), 황화(黃華)등과 함께 학생운동의 영수로 두각을 나타냈다. 12·9 운동 시절 시위대의 대대장 6명 중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국민당이 학생운동에 관한 보도를 통제하자 외국 기자들을 초청해 유창한 영어로 자신들의 활동을 알렸다. 수십 년간 중공의 입이 될 자질을 이때부터 보여주었다.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본격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했다. 항일 근거지 충칭(重慶)과 옌안(延安)으로 향하는 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궁웨이항은 옌안을 택했다.

궁은 어린 시절부터 펑파이(澎湃)를 숭배했다. 펑파이는 광둥(廣東)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풍요로움을 내팽개친 중국 최초의 농민운동 지도자였다. 궁은 상하이를 떠나며 궁펑(<9F94>澎)으로 개명했다. 미국 유학을 떠나는 언니 편에 옌안 행을 결정하기까지의 일들을 영문으로 적어서 보냈다. 그의 자전을 받아본 펄벅은 “좋은 글이다. 그러나 젊은 여자의 삶에 애정에 관한 이야기가 한 줄도 없는 것이 애석하다”고 했다.

한국전 휴전회담 진행 중 개성에서. 오른쪽은 북한 수석대표 남일.
옌안에는 도시에서 온 여학생이 많았다. 혁명과 전쟁을 칵테일 파티 정도로 착각한 철부지들에게 옌안은 낭만의 산실이 아니었다. 구멍 난 신발과 남루한 복장은 기본이었다. 목욕은 한 달에 한 번도 감지덕지였다. 머리와 온몸에 이가 들끓었다. 이를 혁명충(蟲)이라고 불렀다. 끙끙거리며 온 길을 다시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부모들이 정해준 사람과의 결혼을 피해 왔거나 시궁창 같은 남편을 버리고 가출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모두가 사연투성이들이었다. 궁펑은 예외에 속했다.

당시 옌안과 항일성지 태항산(太行山)에는 어린 처녀와 늙은 총각들이 많았다. 주더(朱德)는 캉커칭(康克淸)과 결혼했고, 류샤오치(劉少奇)는 셰페이(謝飛), 셰자오짜이(謝覺哉)는 왕딩궈(王定國), 쉬하이둥(徐海東)은 저우둥빙(周東屛), 쩡산(曾山)은 덩류진(鄧六金)과 결혼했다. 한결같이 나이든 신랑과 어린 신부였다. 궁펑은 늙은 총각들을 실망시켰다. 류원화(劉文華)라는 청년과 결혼했다. 8년간의 독일 유학을 마치고 항일전선에 뛰어든 엔지니어였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나무에 서로의 이름과 결혼 날짜를 새겨 넣었다. 1940년 8월의 일이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궁펑을 빨치산으로 놔두기에는 아까웠다. 전시 수도 충칭에 있던 중공의 연락사무소 남방국으로 파견했다. 류원화는 전선인 태항산으로 떠났다. 젊은 부부는 결혼 29일 만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이별을 했다. 류는 2년 후 전사했다.

국공합작 시절이다 보니 중공은 불법단체가 아니었다. 무장한 야당이었다. 궁펑의 합법적인 신분은 신화일보 기자였지만 남방국 책임자 저우언라이의 대변인이었다. 충칭에 상주하던 100여 명의 외국 신문·통신사의 기자들은 한결같이 궁펑의 입을 주시했다.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와 신화일보에 실린 중요한 문장을 비롯해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의 담화문이 궁펑의 손을 거쳐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30여 년간 지속될 중공 최초의 대변인이며 여성 외교관의 탄생이었다.

미 국무부가 파견한 문관 자격으로 충칭에 거주하던 페어벵크는 “총명하고 매력이 넘치는 젊은 여성의 이름은 궁펑이었다. 그가 성명을 발표할 때마다 기자들은 넋을 잃었다. 발광 직전까지 가는 젊은 기자들이 허다했다. 야당의 입장에서 집권당의 죄악을 폭로하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예리한 통찰력과 해학은 신선한 공기와 같았다. 궁펑은 청춘의 상징이었다”고 극찬했다. 국민정부의 신문국에 자료를 얻으러 오는 외국 기자들의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국민당 신문국장 장핑췬(張平群)도 “그를 볼 때마다 영원히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미래에 일생을 바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항상 밝은 내일을 소리 높여 노래한다. 그와의 싸움은 허망하다”며 정적(政敵)인 궁펑을 찬양했다. <계속>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