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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번째 주인 맞은 한컴, 영광과 시련의 20년 드라마

'한국 1호 벤처' 한글과컴퓨터(한컴)의 주인이 또 바뀌었다. TG삼보컴퓨터는 모회사인 셀런, 관계사 셀런에스엔과 공동으로 이 회사를 인수키로 했다고 10일 밝혔다. 인수 규모는 한컴의 현 대주주인 프라임그룹이 보유한 주식 646만여 주(28%)다. 매각 대금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관련 업계에선 500억원 안팎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로써 TG삼보는 한컴의 여덟 번째 주인이 됐다. 평균 30개월에 한 번씩 대주주가 바뀐 셈이다. 한컴 20년의 영광과 시련, 역경과 재기의 드라마엔 한국 정보기술(IT) 벤처기업 역사의 명암이 그대로 투영돼 있다.

한컴을 창업한 건 한때 '한국의 빌 게이츠'로 추앙받던 이찬진 현 네오위즈 사장이다. 1989년 당시 서울대 기계공학과 학생이던 이 사장은 공대 친구들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워드 프로세서인 '아래아한글'을 개발했다. 같은 해 서울 종로 세운상가의 러브리소프트웨어를 총판으로 베타버전을 내놨다. 컴퓨터 사용자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한글, 한자는 물론 수십개 국가의 언어를 소프트웨어 하나로 구현해 내 큰 찬사를 받았다. 지금은 당연시 되는 '화면 상에 편집된 그대로'를 출력할 수 있다는 점 또한 매력적이었다.

아래아한글의 성공을 기반으로 이 사장은 이듬해 10월 한컴을 창업했다. 회사는 성장을 거듭해 1996년엔 IT기업 최초로 코스닥에 등록했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 가지 않았다. PC 운영체계가 '도스'에서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로 넘어가는 추세를 제 때 읽어내지 못한 데다, 소비자들의 품질 개선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때문이라는 게 당시 업계의 지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문제는 불법 소프트웨어의 범람이었다. 가정용 PC 중 아래아한글 소프트웨어가 깔리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지만 매출은 그만큼 오르지 않았다. 한컴은 갖가지 복제 방지 조치를 취했으나 번번이 구멍이 뚫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98년 외환 위기가 시작됐다. 자금난에 몰린 한컴은 놀라운 선택을 한다. MS로부터 2000만 달러를 투자받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것이다. 조건은 한글 사업 포기. 이 소식은 국민 감정을 크게 자극했다. 범국민적인 '한글 살리기' 운동이 시작됐다.

당시 벤처업계 대부로 통하던 이민화 메디슨 사장이 중심이 돼 '아래아한글사랑운동본부'를 결성했다. 운동본부는 '1인 1소프트웨어(SW) 갖기 운동'을 전개했다. 100여일 만에 65만 명이 '한글815특별판'을 구매했다. 개인 PC 사용자는 물론 기업, 정부기관까지 나섰다. MS 투자를 추진했던 이찬진 사장과 창업 멤버들은 98년 가을께 회사를 떠났다. 운동본부는 국민주 공모를 추진했지만 모인 자금은 20억원에 불과했다. 이민화 사장은 '특단의 조치'를 단행했다. 메디슨 직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0억원을 지원한 것이다. 이로써 메디슨이 한컴의 새 주인이 됐다.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사장의 강력한 추천으로 한컴의 새 사장이 된 전하진 사장(현 인케코퍼레이션 사장)은 새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인터넷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마침 분 닷컴바람에 힘입어 한컴의 포털 '네띠앙'과 채팅 사이트인 '하늘사랑'은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2000년 닷컴 거품이 빠지면서 한컴은 다시 위기에 몰렸다. 경영권 분쟁마저 일어나 홍콩계 사모펀드 웨스트 애비뉴가 새 주인이 됐다. 전 사장은 경영난의 책임을 지고 회사를 물러났다.

2001~2003년까지 한컴의 주인은 네 차례나 바뀌었다. 티티앤·넥스젠캐피털·서울시스템·프라임 그룹. 회사가 표류하는 와중에도 직원들은 연구 개발에 매달렸다. 새롭게 내놓은 '한컴오피스'가 기업 시장에 안착하는 데 성공했다. '한글 2002' 버전은 자사 SW 중 역대 최다 판매를 기록했다. 2003년 6월 대주주가 된 프라임 그룹도 회사 경영에 의욕적으로 나섰다. 경영도 흑자로 돌아섰다. 현재 한컴오피스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20%다. MS오피스가 진출한 국가 중 토종 오피스 프로그램이 이만한 시장 점유율을 가진 곳은 한국이 유일하다고 한다.

이처럼 안정적 경영 속에 국내 대표 SW업체로서의 위상을 되찾아가던 한컴에 최근 다시 위기가 닥쳤다. 모회사인 프라임그룹이 무리한 동아건설 인수로 경영난에 봉착한 것이다. 지난해 말엔 프라임그룹 오너이기도 한 백종진 전 사장이 배임·횡령 혐의로 구속됐다. 프라임은 올 초 한컴을 인수합병(M&A) 시장에 공식적으로 내놓았다. 이후 5개월간 새 주인으로 거론된 업체는 NHN·누리텔레콤·소프트포럼·잉카인터넷 등 예닐곱 개에 이른다. 한컴의 한 직원은 "그간 겪은 마음 고생을 말로 다 할 수 있겠느냐. 소액주주들의 항의 전화도 많이 받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새 대주주인 TG삼보가 한컴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한컴의 새 주인인 TG삼보의 모회사는 IPTV 셋톱박스 등을 생산하는 셀런이다. 셀런의 오너인 김영민 부회장 역시 한국 IT벤처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국내 1호 벤처인 한컴, 최초의 컴퓨터 전문기업인 삼보의 브랜드 파워와 기술력을 결합해 시너지를 극대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TG삼보컴퓨터는 특히 학교·공공기관의 대량 납품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다. 여기에 한컴의 SW를 결합해 윈-윈할 수 있는 길을 열겠다는 것이다.

한컴의 20년 영욕엔 언제나 국민이 있었다. 외국 기업으로 넘어갈 뻔한 한컴을 살린 것도, 무분별한 불법 복제로 궁지에 몰아넣은 것도 국민이었다. 한컴에 따르면 지난해 공식 집계된 아래아한글 불법북제 건수는 1만2000건, 35억원 어치에 달한다. '아래아한글은 공짜'라는 인식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국민과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한컴에 재도약의 길을 열어주는 것일 게다. 한컴 또한 '애국심 마케팅'에 주력하기 보다는 세계 어디 내놔도 인정받을 수 있는 우수 SW를 개발해 그간 국민이 보여준 성원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이나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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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