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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상의 시시각각]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위기

9일 밤 11시쯤 비 내리는 서울광장을 찾았다. 민주당 의원들이 10일 집회를 위해 광장을 지키느라 1박2일 노숙에 들어갔다는 얘기를 듣고 궁금했다. 광장은 초여름 빗발처럼 을씨년스러웠고, 광장을 비치는 서치라이트는 묘한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덕수궁 입구인 대한문 처마 아래쪽엔 오래전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를 지키던 일군의 무리들이 웅성거리며 광장을 지켜보고 있다. 차도를 건너 광장 모퉁이엔 젊은 의경들이 비옷을 입은 채 굳은 표정으로 대오를 지어 섰다. 광장 가운데 대형 텐트 4개가 서 있고 앞쪽으로 100여 명의 인파가 둘러섰다. 텐트 뒤쪽엔 ‘광장 없이 민주 없다. 서울광장 열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스티로폼을 깐 텐트 안쪽 한가운데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자리 잡았다. 역시 굳은 표정이다.

비 내리는 어두운 광장 한가운데 촛불을 들고 밤을 지새우는 제1 야당의 모습. 헌정사에 남을 한 장면이다. 그들이 되살리고자 하는 22년 전 6월 항쟁의 함성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슬픈 장면이었다.

1987년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던 당시는 다른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목표가 있었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동의했던 목표는 ‘민주화’. 군부독재의 퇴진과 대통령 직선제 도입이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불가결한 정치적 틀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그런 제도와 절차가 없었기에 국민적 열망은 광장이란 공간을 통해 쏟아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의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어쩌면 자연스럽게 직접민주주의가 작동한 셈이다. 아슬아슬했지만 다행히 성공했다.

민주화라는 하드웨어의 교체는 진정한 민주주의 정착이라는 소프트웨어의 변화를 숙제로 남겼다. 민주화 이후 22년, 9일 밤 광장을 지키는 민주당의 모습은 우리의 초라한 성적표다. 민주화 이후 한 세대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대의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뜻을 정치적으로 수렴해야 하는 정당은 대의민주주의의 꽃이다. 그 꽃이 대의민주주의 전당인 의사당 대신 직접민주주의 현장인 광장을 지키고자 밤을 지새우고 있는 셈이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정책기획위원장으로 정치현장을 경험했던 진보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고려대 명예교수)는 DJ정부 말기인 2002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위기’라는 진단을 내렸다. 민주화로 제도가 마련됐음에도 불구하고 정당이 제 기능을 못하는 바람에 대의민주주의가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3년 뒤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개정판을 내면서 최 교수는 ‘정국의 급격한 전환을 가져온 많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책의 내용을 바꿀 필요가 없었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다시 4년, 보수정권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는 여전히 위기다. 대의민주주의의 불통(不通)이 여전하니 답답한 민심은 광장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22년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2500년 전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로 돌아갈 수도 없다.

해답은 있다. 민주당 스스로 만들어둔 대안이 있으며, 몸으로 보여준 성공사례도 있다. 전자는 박상천법이며, 후자는 농협법 개정이다. 전자는 박상천 의원이 제안한 국회법 개정안이다. 쟁점법안이라도 무조건 상정하되, 여야 간 조정절차를 의무적으로 거치게 하고, 그 과정에서 소수의 목소리 보호를 위해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민주당은 당론으로 채택한 박상천법을 통과시켜 국회 공전과 몸싸움의 구태를 혁파해야 한다. 농협법 개정은 지난 4월 농림식품수산위에서 여야 의원이 서로 합의해 통과시킨 농협 개혁안이다. 이낙연 위원장 등 민주당이 보여준 대화와 타협의 모범사례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공개 서명식이란 세리머니로 반긴 법안이다.

민주당은 광장 없이도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오병상 편집국장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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