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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도 사대부’ 예학의 틀에 갇혀버린 효종 장례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인조반정 이후 국왕은 천명이 아니라 사대부가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 존재로 전락했다. 서인은 소현세자를 제거하고 효종을 추대했지만 둘째 아들로 낮춰 보았다. 국왕을 사대부 계급의 상위에 있는 초월적 존재로 보려는 왕실의 시각과 제1 사대부에 불과하다고 보는 서인의 시각은 큰 괴리가 있었다. 국왕 독점의 권력이냐 사대부 균점의 권력이냐의 문제였다. 양자의 시각이 충돌한 것이 제1차 예송(禮訟) 논쟁이었다.

조선 성리학의 흐름을 예학으로 이끈 태두 김장생을 모신 충남 논산 돈암서원. 김장생과 송시열·송준길 등 당대의 서인-노론 계열 예학자들을 배향하고 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도 살아남았던 47개 서원 중 하나다. 사진가 권태균


국란을 겪은 임금들 현종① 제1차 예송 논쟁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 일행이 인질로 끌려간 지 5년 만인 인조 19년(1641) 2월 4일 심양(沈陽)의 조선관(朝鮮館)에서 태어난 아이가 현종이었다. 『현종실록』은 ‘왕의 휘는 연( )으로 효종대왕의 맏아들’이라고 적고 있다. 『현종실록』은 현종이 인조 22년(1644) ‘동국으로 돌아왔다’고 적고 있는데 부친과 소현세자가 영구 귀국하기 1년 전이었다. 『현종실록』은 “을유년(인조 23년:1645)에 소현세자가 죽어 효묘(孝廟:효종)께서 둘째 아들로 왕세자에 책봉되자 왕 역시 원손(元孫)의 봉호가 올려졌다”고 적고 있다. 그 전까지 원손은 소현의 장남 석철이었다. 조선의 종법(宗法)은 소현세자의 뒤를 석철이 이어야 했으나 봉림대군이 이어받았고 원손의 지위도 이연이 차지하게 되었다.

송시열의 초상 : 송시열은 효종 국상 때 표면적으로는 경국대전을 인용해 자의대비 복제를 1년으로 의정했지만 내면적으로는 둘째 아들로 대우한 것이었다.


조선 후기는 ‘효종→현종→숙종’의 피를 이은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이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뜻하는 핏줄이 된다. 쿠데타를 일으켜 화가위국(化家爲國)한 인조에서 시작하지 않는 이유는 소현세자가 아닌 둘째 효종이 왕위를 이었음을 중시하는 의미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효종은 정통성 시비에 휘말려야 했다. 속으로는 명나라를 섬기며 북벌을 외치지만 현실로는 청나라에 사대했던 조선 사대부는 효종에 대한 태도에서도 이중적 성격을 띠었다.

숭명반청(崇明反淸)을 기치로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은 청나라를 인정하려 했던 소현세자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소현세자가 제거되었다면 그 뒤를 누가 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기준이 있어야 했다. 종법에 따라 원손 석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목숨 걸고 간쟁하든지, 비록 편법이지만 봉림대군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효종의 왕위 계승도 인정하면서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姜嬪)과 그 아들들의 신원(伸寃)도 요구했다. 소현세자 일가의 억울한 죽음과 효종의 왕위 계승은 한몸이었다. 소현세자와 그 일가의 억울한 희생 위에서 효종이 국왕이 될 수 있었다. 이는 세조냐 단종이냐의 문제와 같은 것이었다. 정인지·신숙주가 되든지 성삼문·박팽년이 되든지 한길을 택해야 했다.

그러나 서인은 몸은 정인지·신숙주의 길을 선택했으면서도 마음은 사육신이고 싶어 했다. 효종을 왕으로 섬기면서 강빈과 그 아들들의 신원을 요구했다. 이는 효종의 왕위 계승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모순이 현실에서 폭발한 사건이 제1차 예송 논쟁이었다. 기해년(1659)에 벌어졌다 하여 기해예송(己亥禮訟), 또는 상복 문제로 논쟁했다 하여 기해복제(己亥服制)라고도 하는 예송 논쟁은 효종의 국상 때 계모(繼母)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를 놓고 발생한 것이었다. 예송이 민감한 정치적 현안이 된 데는 두 가지 배경이 있었다.

윤휴의 초상 : 윤휴는 ‘임금의 예는 일반 사대부나 서민과 다르다’는 논리로 자의대비 복제를 3년으로 주장했다.

첫째, 조선 후기 성리학의 흐름이었다. 양란(兩亂:임진·병자) 이후 피지배 백성의 신분제에 대한 저항이 커지자 서인 유학자들은 예학(禮學)을 강화해 신분제를 고수하려 했다. 양반에서 노비로 전락한 송익필(宋翼弼)이 조선 예학을 크게 발전시켰다는 것 또한 모순일 수밖에 없는데, 김장생(金長生)은 송익필의 예학을 크게 발전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가 되었다. 김장생의 예학은 아들 김집(金集)과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로 계승되면서 조선 성리학의 주류가 되었다. 서인이 율곡의 개혁사상을 사장시킨 채 예학을 조선 사상의 주류로 만든 이유는 백성의 신분제 철폐 움직임에 맞서 지배층의 계급적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예(禮)란 본질적으로 하(下)가 상(上)을 섬기는 형식적 질서일 수밖에 없었다.

둘째, 효종에 대한 서인의 이중적 태도였다. 인조반정 후 서인에게 임금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사대부 중의 제1 사대부에 불과했다. 효종이 왕통은 이었지만 가통으로는 둘째 아들에 불과하다고 나누어 생각했다. 효종에 대한 이런 이중적 태도가 예송 논쟁의 발단 원인이었다. 고대 『주례(周禮)『나 『주자가례』 등에서 규정하는 상복(喪服)은 다섯 종류가 있었다. 참최(斬衰:3년), 재최(齋衰:1년), 대공(大功:9개월), 소공(小功:5개월), 시마(<7DE6>麻:3개월)가 그것이다. 부모상에는 자녀가 모두 3년복을 입고 자식상에도 부모가 상복을 입었다. 장자(長子)의 경우는 3년, 차자(次子) 이하는 1년복이었다. 효종 승하 때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기간이 문제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왕통을 이었지만 가통(家統)으로는 차자로 여긴 것이다. 소현세자의 아들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이 문제는 큰 폭발력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부왕의 급서로 경황이 없던 18세의 왕세자(현종)에게 예조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 발단이었다. 예조는 대비의 상복 규정에 대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나와 있지 않다면서 “혹자는 당연히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혹자는 1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상고할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대신들과 의논하소서”(『현종실록』 즉위년 5월 5일)라고 주청했다. 서인 대신은 대부분 1년복이 맞다고 생각했다.

국왕이지만 차자라는 생각이었다. 집권 서인의 의견에 따라 그렇게 결정되려 할 때 전 지평 윤휴(尹휴)가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의례(儀禮)』 ‘참최장(斬衰章)’의 주석에 ‘제일 장자가 죽으면 본부인(嫡妻) 소생의 제이 장자를 세워 또한 장자라 한다’고 쓰여 있다는 점을 들어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황한 왕세자(현종)는 “두 찬선(贊善)에게 모든 것을 문의하라”고 명하는데 두 찬선은 송시열과 송준길이었다.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윤휴의 3년복설을 듣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에게 서한을 보내 의견을 묻자 정태화는 송시열에게 되물었다. 송시열은 “예법에 천자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장자가 죽고 차장자(次長子:둘째아들)를 세우면 그 복제 역시 장자와 같습니다만 그 아래 사종지설(四種之說)이 있습니다”(『현종실록』 즉위년 5월 5일)고 답했다. 3년복을 입지 않는 네 가지 예외 사항인 사종지설(四種之說)은 극도로 민감한 문제였다. 송시열은 정태화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①정이불체(正而不體)는 맏손자가 승중(承重)한 것이고, ②체이부정(體而不正)은 서자(庶子)가 후사가 된 것이고, ③정체부득전중(正體不得傳重)은 맏아들이 폐질(廢疾:불치병)에 걸린 것이고, ④전중비정체(傳重非正體)는 서손(庶孫)이 후계자가 된 것입니다.”(『국조보감』현종 즉위년)

부모가 3년복을 입지 않는 네 가지 경우는 ①손자가 후사를 이은 경우 ②장자가 아닌 아들(庶子)이 후사를 이은 경우 ③장자가 병이 있어 제사를 받들지 못한 경우 ④맏손자 아닌 손자(庶孫)가 후사를 이은 경우라는 설명이었다. 남인이 편찬한 『현종실록』은 이때 송시열이 정태화에게 “인조(仁祖)로서 말하면 소현의 아들이 정이불체이고 대행대왕(효종)은 체이부정입니다”고 답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자 정태화가 깜짝 놀라 손을 흔들어 막으면서 “예가 비록 그렇다 해도 지금 소현에게 아들이 있는데 누가 감히 이 이론으로 지금 논의하는 예의 근거로 삼겠습니까?”라고 말렸다.

송시열은 ‘이택지에게 보낸 편지(與李擇之)’에서 “영상(정태화)이 머리를 흔들어 말리면서 ‘소현에게 아들이 없다면 정이불체라는 말을 할 수 있지만 내가 지금 어떻게 감히 이 설을 말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송시열은 또 정태화가 “제왕가(帝王家)의 일은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그 때문에 큰 화(禍)가 일어나는 것이 많습니다. 지금 소현세자의 아들이 있으니 정이불체 같은 말이 훗날 한없는 화의 근본이 될까 두렵습니다”는 말도 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정태화와 송시열은 국제(國制), 곧 『경국대전』을 근거로 1년으로 의정해 올렸다. 『경국대전』 ‘예전(禮典)’의 ‘오복(五服:다섯 가지 상복)조’에는 장남과 차남의 구별 없이 ‘기년(期年)’으로 기록된 것에 착안한 것이다. 속으로는 효종을 체이부정으로 여겼지만 겉으로는 『경국대전』에 따라 장남으로 대우한 것처럼 편법을 쓴 것이다.
그런데 장남과 차남은 구분하지 않았던 『경국대전』은 장자처(長子妻:큰며느리)는 기년(期年:1년), 중자처(衆子妻)는 대공(大功:9개월)이라고 구분해 놓아 15년 후 제2차 예송 논쟁의 불씨가 된다. 현종은 1년복설이 내심 불쾌했지만 송시열 같은 예학자들의 논리를 반박할 학문이 없었다. 그러나 커다란 내부 모순을 안고 있는 이 문제가 그냥 덮어질 수는 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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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