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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만화, 예술, 과학기술이 만날 때

만화 구경을 하게 될 줄로만 짐작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3일 개관한 한국만화 100년 기념 전시회를 보러 간 길이었다. 뜻밖에도 미술 구경까지 겸했다. 이번 전시가 우리 만화의 역사만 아니라, 만화·미술의 경계에 있는 작품까지 선보였기 때문이다.

뜻밖의 구경도 흥미로웠다. 우선 로보트 태권 브이의 다채로운 변주가 눈에 띄었다. 악당과 싸우다 피곤에 지쳤는지, 로보트 태권 브이가 긴 의자에 벌렁 누운 조형물에서는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태권 브이가 엉뚱하게도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하는 캔디의 주제가를 배경으로 꽃밭을 내달리는 그림도 그랬다. 익숙한 캐릭터를 새로운 문맥에 등장시킨 미술작가들의 발상에 더해, 이들에게 창작의 영감을 준 캐릭터 자체의 힘이 느껴졌다. 다빈치의 그림으로 유명한 모나리자의 미소를 노란색 스마일 마크로 대체한 작품도 있다. 생략과 과장을 통해 사물의 핵심을 파악하는 만화의 힘이 떠올랐다.

만화를 ‘제9의 예술’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우리네 일상에서 만화와 예술의 위상에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 ‘만화 같다’는 표현이 그 예다. 드라마·소설·영화 같은 다른 장르에 이 말을 붙이면, 대개 유치하다·터무니없다 등 비판의 뜻이 되곤 한다. 만화로서는 억울한 노릇이다. 만화 자체로 뛰어난 예술적 성취를 이룬 작품이 동서양에 한둘이 아니다. 반면 통칭해서 ‘예술’로 불리는 작품 중에도 졸작과 걸작의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이번 전시는 만화와 미술의 울타리를 허물었다. 만화계의 오랜 억울함을 조금은 달래주려는 취지로 보인다.

만화 구경을 간 길에, 뉴미디어와 예술의 또 다른 만남도 목격했다. 전시장 출구 쪽에 걸린 작가 이이남의 작품 세 편이 그런 경우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비롯, 눈에 익은 조선시대 그림 세 편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정적인 듯 보이던 그림 속 풍경은 4분 남짓한 동안 조금씩 변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드러낸다. 설치미술, 아니 애니메이션이라고도 부를 법한 이 작품들은 최신 LED TV에 담겼다. 이 분야의 대선배 백남준이 활용한 것은 두툼한 브라운관 TV였다. 그래서 작품에는 조형물의 느낌이 강했다. LED 패널은 두께가 회화의 액자틀 정도로 얇다. 덕분에 이이남의 작품에선 디지털 캔버스에 담긴 회화의 맛이 난다.

만화 역시 뉴미디어를 새로운 캔버스로 삼는 데 적극적이었다. 1990년대 말부터 젊은 만화작가들은 인터넷을 무대로 이른바 웹툰, 즉 인터넷 만화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웹툰은 만화의 형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좌우로 넘겨보던 기존의 만화책과 달리, 상하로 긴 화면을 스크롤바로 움직여 보게 되는 인터넷의 특징을 자연스레 반영했다.

만화는 내용에서도 동시대를 한참 앞서 가곤 했다. 1950년대 말 처음 등장한 SF만화 라이파이도 그랬다. 만화 속에서 우주공간까지 자유로이 누비는 용사 라이파이는 2110년생이다. 지금부터 100여 년 뒤에나 태어날 캐릭터란 얘기다. 그사이 만화·예술·과학기술이 아무쪼록 자주 만나기를 빈다.

이후남 중앙SUNDAY 문화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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