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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는 북벌 외치며, 武臣 우대 발목 잡은 文臣들

병자호란 때 조선을 침략했던 청 태종과 효단문황후(孝端文皇后)의 심양 북릉. 200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효종은 북벌을 꿈꾸며 군비를 증강했으나 문신의 반발에 부닥쳤다. 사진가 권태균
국란을 겪은 임금들 효종④ 사대부들의 저항

‘삼전도의 치욕’ 이후 모두 북벌을 주창했지만 속내는 두 종류였다. 하나는 효종과 병조판서 박서(朴筮)·원두표(元斗杓), 훈련대장 이완(李浣)처럼 실제 북벌을 단행하자는 쪽이었다. 다른 하나는 입으로는 북벌을 주창하지만 실제로는 북벌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반대하는 쪽이었다. 대다수 문신이 여기에 속했다. 효종은 재위 1년(1650) 6월 도승지 박서가 “근래 날마다 세 번씩이나 경연을 개최하셔서 옥체가 피곤하실까 염려되오니 하루에 한 번씩만 열도록 하소서”라고 건의할 정도로 학문에도 뜻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즉위를 천명(天命)으로 승화하는 것은 북벌이지 학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북벌에 매진했다.

효종은 재위 2년(1651) 8월 박서를 병조판서로 임명했다. 박서는 문관이었지만 도승지를 역임한 데다 효종의 군비 확장 계획에 대다수 문신이 반대할 때 홀로 ‘수륙군환정사목(水陸軍換定事目)’이란 군정 개혁 5개조를 내놓고 찬성했던 인물이다. 박서에게 지경연(知經筵)을 겸하게 한 이유는 경연을 북벌 논의의 장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벌 대의에 동조하던 박서는 효종 4년(1653) 6월 급서하고 말았다. 효종실록이 “연일 과음하다가 갑자기 죽었다”고 적은 대로 과음에 의한 쇼크사였다. 사관은 “박서가 병조판서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몸가짐이 검소했고 군국(軍國)의 계책이 임금의 뜻에 부합했으므로 임금이 총애하고 신임했었다”고 적고 있다.

효종은 박서의 뒤를 원두표에게 맡겼다. 원두표 역시 군비 증강을 지지하는 소수 문신 중 한 명이었다. 효종은 또 이완을 어영대장에 임명해 문무를 조화시켰다. 문신 원두표에게는 북벌 기획을, 무신 이완에게는 실행을 맡기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효종의 북벌 대의 앞에는 수많은 암초가 가로막고 있었다. 가장 큰 암초는 사대부의 숭문천무 사상이었다. 임진·병자 양란을 겪고도 이런 사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효종은 이런 현상을 강하게 비판했다.

조선 후기에 많이 배치된 화포류, 효종은 북벌을 위해 소총수 부대를 양성하고 훈련도감에 무기를 개량하도록 지시했다. 사진가 권태균
“우리나라 장수들은 이웃 나라에 견주어 부끄럽다. 문관은 문을 숭상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무관은 무를 숭상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며 국가에서 취하는 것도 이것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문관이 무변(武弁)처럼 생기면 경시당하지만 무관이 서생(書生)처럼 생기면 용납된다.”(『효종대왕 행장』)

온 국토가 외적의 말발굽에 유린되는 참화를 겪고도 무를 경시하는 풍조는 여전했다. 효종은 “무관이 말달리기를 좋아하면 반드시 광패(狂悖)스럽다고 지목하니 풍조가 괴이하기 그지없다…지금 세상에 서생 같은 무관이 어떻게 전진(戰陣) 사이에서 힘을 쓸 수 있겠는가?”라고 개탄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문신이 아니라 무신이 군사를 지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효종은 “전시에 일개 서생들이 군사를 지휘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큰 폐단이다”고 비판했다. 무신 사령관을 문신 도체찰사가 지휘하는 군사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효종은 군사는 무장에게 맡기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밭갈이는 마땅히 남자 종에게 묻고 길쌈 일은 마땅히 여자 종에게 물어야 한다’고 하였다.…문이라 이름하였으면 독서와 강학(講學)에 힘써야 하고 무라 이름하였으면 무예와 병법을 익히면 될 뿐이다. 무인의 길은 차라리 거칠고 사나운데 지나칠지언정 나약하고 옹졸해서는 안 되는데, 오늘날 비국의 낭청이 슬기롭고 힘 있는 자를 뽑지 않고 단지 글자나 아는 영리한 자를 뽑다 보니 모두 서생뿐이다. 긴급하게 적을 상대할 때 서생을 쓸 수 있겠는가. 이는 우리나라 풍습이 추구하는 하나의 커다란 병폐이다.”(『효종실록』 3년 5월 15일)

군사 전문가에게 군사를 맡겨야 한다는 말이었다. 효종은 숭문사상에 젖은 사대부와 싸우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무장을 양성하려 했다. 특별 무과시험인 관무재(觀武才)를 실시한 게 그중 하나였다. 효종은 재위 4년(1653) 9월 춘당대(春塘臺)에서 관무재를 실시하고 성적 우수자에게 지방 수령을 제수해 사기를 높이려 했다. 그러자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수령은 상으로 줄 수 있는 벼슬이 아니니 다른 상을 주소서”라고 반대했다. 그래서 효종은 첨사(僉使:병마절제사)를 제수할 수밖에 없었다. 무장 양성에 좋은 제도는 영장(營將) 제도였다. 임란 때 류성룡의 주도로 양반과 노비들을 함께 배속시켜 조직했던 부대가 속오군(束伍軍)인데 지방의 몇 개 속오군을 통합 지휘하는 직책이 영장이었다. 처음에는 무장이 임명되었다가 임란이 끝난 후 지방 수령이 겸직했는데 정묘호란 때 문신 수령들이 지휘법을 몰라 기껏 기른 군사들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병조판서 박서는 효종 3년(1652) 2월 “만약 군정을 다시 밝히려 한다면 무엇보다 다시 영장을 설치해야 합니다”며 부활을 건의했다. 효종은 “경의 말이 옳다”면서 의정부에 논의시켰으나 논의만 분분할 뿐 박서가 죽을 때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효종 5년(1654) 2월 병조판서 원두표가 “사변은 항상 뜻하지 않은 데서 발생하니 남방의 16영(營)에 영장을 차출해 보내 군무(軍務)를 전적으로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고 다시 건의했다. 이번에는 효종도 의정부에 맡기지 않고 “삼남에 먼저 차출해 보내라”고 동의했다. 원두표가 이때 “여러 고을의 군사를 통제하는 영장이 품계가 낮고 미천하면 누가 기꺼이 명령을 따르겠습니까”라며 높은 직급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문신은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효종은 “많은 말 할 것 없다. 나이는 어리지만 기예가 있는 자들을 우선 시험적으로 써 보다가 효과가 없으면 자급(資級)을 빼앗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효종실록』5년 4월 13일)라며 고위 직급을 주라고 명령했다.

효종이 같은 해 12월 무신 유혁연(柳赫然)을 승지로 임명한 것도 무신을 우대하기 위한 조치였다. 『효종실록』은 “유혁연은 무인 유형(柳珩)의 손자이고 유효걸(柳孝傑)의 아들인데, 수원부사로 있을 때 사졸들을 훈련시키고 무기를 수리했는데 임금이 유능하다고 여겨 특별히 승지를 제수한 것이다”고 적고 있다. 유혁연의 조부 유형은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한 무반(武班) 가문이었고, 유혁연도 인조 22년(1644) 무과에 급제한 무관이었다. 또다시 사헌부에서 즉각 반대하고 나섰다. 사헌부는 “무신으로서 승지가 된 경우는 국조(國朝) 이래 없었습니다…유혁연을 특별히 승지에 제수하자 여론이 모두 놀라고 해괴하게 여깁니다”면서 명을 거둬 달라고 말했다. 여론이란 승지는 문신만이 할 수 있다는 문신의 의견일 뿐이었다.

효종은 문신의 반대를 묵살하고 유혁연의 승지 임명을 강행했다. 효종이 유혁연을 승지로 임명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유혁연은 병방(兵房)승지로서 병조에 관한 일을 전담하는 자리였다. 효종은 지방관을 파견할 때 특별히 군사관계 일은 병조판서에게 직보하고 병조판서는 무신 승지 유혁연에게 전달하게 했다.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외교안보비서관인 셈이었다. 효종은 또 문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친위군인 금군(禁軍)을 늘리고 창덕궁 후원(後苑)의 담장을 헐어 기사장(騎射場)을 만들어 주었다. 지형이 험준한 조선보다 광활한 만주와 중원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기마병을 양성하려 한 것이다.

이처럼 갖은 방법으로 무장을 양성하고 군비를 증강한 결과 재위 6년(1655) 무렵에는 상당한 병력을 갖게 되었다. 효종은 이해 9월 28일 장릉(章陵)에 참배하는 날을 조선군의 위용을 과시하는 날로 삼았다. 장릉으로 떠나면서 노량진에서 배 위에 올라 군사들이 진 친 모습을 보면서 시신(侍臣)들에게 “이런 군사와 말이 있어도 제대로 통솔을 못 하면 쓸모없는 군졸이 될 것이니 참으로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김포의 장릉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노량진에서 군사들의 훈련을 직접 참관했다. 『효종실록』은 “임금이 서문을 따라 말을 타고 달려 들어가면서 시신들에게는 곧바로 남문을 따라 들어갈 것을 명했다”고 전하면서 “오랫동안 훈련을 하니 서울의 사대부가 여자들까지 와서 구경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동원된 군사는 모두 1만3000여 명이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한 지 20여 년 만이었다. 효종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북벌에 나서 ‘삼전도의 치욕’을 씻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북벌 추진에 대한 문신의 반발은 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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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