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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덕수궁 옆에 있는 성공회 성가수녀원의 정원에서 오카타리나 수녀사제가 애견 기쁨이와 망중한(忙中閑) 보내고 있다. 오른쪽 상단은 삼소회 회원들이 2006년 인도 바라나시에서 달라이라마를 만났을 때 사진이다. 최정동 기자
인간 욕구 중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수도자들은 결혼 대신 신앙을 보다 철저하게 실천하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도 안에서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오 복음 19:12)

한국 최초의 수녀 출신 사제
이 성경 구절은 그리스도교 내에서 다양하게 실천된다. 성공회의 경우 수도(修道) 성직자인 수녀와 수사는 결혼하지 않는다. 재속(在俗) 성직자인 사제·주교 등은 독신이 성직 수행의 의무 사항은 아니다. 성공회에서는 수녀도 사제가 될 수 있다. 대한성공회 오인숙 카타리나(67) 수녀사제는 2007년 수녀 출신으로는 한국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감사성찬례(미사·예배) 등 사제가 거행하는 의식을 집전할 수 있다.

예수의 12 제자들이 모두 남자이기에 남자만 사제가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해 오 수녀사제는 “그러한 논리를 따른다면 오늘날에도 유대인 남자만 사제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오 수녀사제는 한국전쟁 직후 고아가 돼 성공회가 운영하는 수원 성베드로 보육원에 들어갔다. 그는 하느님을 만났고 1964년 대한성공회 성가수도회에 입회했다.

오 수녀사제는 서강대 영문학과,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호주 멜버른주립대 특수교육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성공회대 교수, 성가수도회 원장, 성공회신문 논설위원을 역임하며 성공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해 왔다. 오 수녀사제는 2007년부터 런던에서 기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우스터파크에서 새로운 수도 공동체를 개척하고 있다.

오 수녀사제는 삼소회(三笑會) 활동으로도 유명하다. 삼소회는 성공회·가톨릭 수녀, 비구니 스님, 원불교 교무, 개신교 언님 등이 참가하는 종교 간 대화 모임이다. 오카타리나 수녀사제는 삼소회 회원들과 2006년 2월 인도·이스라엘·영국·이탈리아 성지를 순례했다. 순례 중 달라이 라마, 교황 베네딕토 16세 등을 접견하기도 했다.

성서는 전한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내가 곧 가겠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자기 행적대로 갚아주기 위해서 상을 가지고 가겠다’”(요한의 묵시록 22:12). ‘하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어떤 상을 받을까.

영국에서 잠시 귀국한 오 수녀사제를 지난달 22일 성가수녀원에서 만났다. 그는 천국에서 받을 상이 많은 사람이었다.

다음은 인터뷰 요지.
-성직자로서 교수·상담자·논설위원·통역 등 매우 다양한 활동을 하셨습니다.
“영성 분야를 담당하다 보니 활동이 여러 영역에 걸쳐 있습니다. 깊이 있게 하지 못한 측면도 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제일 좋았습니다. 하기 싫어하는 공부를 재미있게 하게 만들었죠.”

-사제가 되신 이유는 무엇입니다.
“여성운동에 기여하고 싶었습니다. 아직 남아 있는 가부장적 전통 때문에 세계적으로 우수한 우리나라 여성 인적 자원의 사회 기여가 미흡합니다. 하느님 나라 사업에서도 여성과 남성은 동등해야 합니다. 여성이 사제가 되는 게 문화적인 전통과 어긋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이 인간을 어떻게 보시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하느님은 남녀를 구별은 하셨지만 차별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세계 성공회 공동체에서는 여성 주교도 나왔을 뿐만 아니라 동성연애자 주교도 나왔습니다. 성공회의 특징은 어떤 문제에 대해 쉬쉬하거나 방치하지 않고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함께 토의하고 고통을 함께 나눕니다.”

-여성 수도자가 사제서품을 받는 경우 신모(神母)라고 불러야 되지 않습니까.
“수녀사제는 교회의 공식 명칭입니다. 신부(神父)에 대응해 신모(神母)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성공회에서 수도원장을 신모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 생활을 40년 넘게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수녀·수녀님이라고 불러주는 게 가장 자연스럽고 편합니다.”

지금은 한국 교회가 영국 교회를 도울 때
-영국에는 왜 가셨습니까.
“영국에서 수도자 공동체를 만들고 있습니다. 21세기에 맞는 수도공동체가 필요합니다. 현대인은 정신 세계를 갈망합니다.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프로그램 개발이 필요합니다. 영성 생활이 풍요하면 일상생활도 풍요해집니다. 그러나 영국의 수도 공동체는 젊은이들이 없어 문닫을 지경이 됐습니다. 영국의 성베드로수녀원은 1892년에 한국에 진출해 40년간 활동했습니다. 영국 수녀들은 암울한 시대에 여성교육, 의료 사업 등을 펼쳤습니다. 이제는 한국 교회가 영국 교회를 도와줄 차례라고 영국 수도공동체 사람들이 10여 년 전부터 요청했습니다.”

-세상에는 왜 고통이 있습니까.
“고통은 삶 속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아닐까요. 예수님도 고통을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이 세상 속 삶에서 어려움이 있을 때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셨는데 나라고 피해갈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만 무겁다고 생각하면 안 될 것입니다. 사람은 고통을 통해 한 단계 더 발전합니다.”

-어려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신 것으로 압니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부모님을 총살했습니다. 눈물·콧물 흘리며 울부짖는 동생을 달래기 위해 나는 ‘숙자야 엄마 오실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때가 하느님께서 나를 깨우치신 순간입니다. 동생을 달래기 위한 내 말과 달리 어머니는 다시 오실 수 없는 것이었죠. 당면한 현실에서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하나를 생각하게 됐죠.

과거를 슬퍼한다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 내 삶은 내가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때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피란민 수천 명이 줄 서서 가는데 나는 동생 손을 꼭 잡고 걸었습니다. 밤이 되면 피란민 15~20명이 마을에 있는 빈집에 들어가 주인이 남기고 간 양식으로 밥을 해 먹고 웅크리고 앉아 잤죠. 먼동이 트면 누군가 ‘이제 일어나 갑시다’라며 사람들을 깨웁니다. 다시 걷기 시작합니다. 폭격기가 뜨면 ‘엎드려’라고 누군가 외칩니다. 총알이 비 오듯 하늘에서 쏟아집니다.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도 했죠. 죽을 뻔하다 살아나니까 ‘하느님이 나를 왜 살렸을까’ 하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하느님 만나고 부모 원수 용서했다
-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셨습니까.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크리스천이 되길 바라신 거죠. 그땐 군인들을 보면 ‘원수 갚아 주세요’라고 말했죠. 나중에 크리스천이 되니까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정치 때문에 생긴 싸움이었습니다.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바쳐진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세상에 나오면 죽음을 향해 갑니다. 빨리 가고 늦게 가는 차이가 있을 뿐이죠. 하느님을 항상 의식하는 삶을 살면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죽음이 있고 고통이 있는 세상이지만 하느님의 나라가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예수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느님은 내가 싫어하는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자 모든 사람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우리 부모를 죽인 인민군도 명령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사람마다 성격과 기호가 달라 하느님을 직접 만져봐야 하고 능력을 직접 체험해야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 범상한 일상생활을 통해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만들 때 ‘우리 모습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죠. 그래서 세상에서 낙인이 찍힌 사람도 하느님 모습을 닮았습니다. 하느님은 나와 관계없는 멀리 계신 분이 아닙니다. 당면한 일을 위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이 있습니다. 우리 양심 속에도 계십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잘 소통하고 거룩한 대화가 이뤄질 때 하느님의 나라가 이뤄집니다.”


오인숙 카타리나 수녀사제 연락처
sistercatheri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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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