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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몰락한 왕조 궁궐에 핀 사쿠라 일제는 갔어도 벚꽃놀이는 남아

 일본에선 벚꽃(사쿠라) 개화일 예측이 틀렸다고 기상청 간부가 사죄를 한다. 날씨 예보가 틀리는 건 용서할 수 있어도 이게 틀리는 건 용서가 안 된다. 요자쿠라(夜櫻·밤벚꽃) 명소인 도쿄 우에노 공원은 4월이면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새벽부터 달려와 돗자리부터 깐다.

조선을 병탄한 일본인들은 서울 창경궁을 우에노 공원처럼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1907년에 순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자 일제는 ‘위로’의 명분으로 전각 60여 채를 헐더니 식물원과 동물원, 그리고 박물관을 세웠다. 4년 뒤에는 궁전에 벚나무 수천 그루를 심었다. 그해 4월 11일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뜻밖에도 개명을 주장한 사람은 순종이었다고 한다. ‘궁’이라고 하면 드나드는 백성들이 마음의 부담을 느낄 수 있으니 ‘원(苑)’으로 하여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배려였다. 나무들이 제법 우거졌을 무렵인 24년 봄 야간 개장을 시작했다. 100W짜리 전등이 매달려 밤이 대낮 같았다. 흰 도포에 갓을 쓴 시골 어르신들도 흔했다. 모던보이·모던걸들은 벚꽃 그늘을 핑계 삼아 사랑을 키우기도 했다. 전차 타고 종로에 와서 화신백화점을 들른 뒤 창경원에 가는 것이 최고 데이트 코스였다.

22년 4월 26일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비운의 황태자 영친왕이 전해에 낳은 아들(晉)을 순종에게 보여 드리기 위해 일시 귀국했다가 벚꽃이 흩날리는 창경원에 들렀다(사진·가운데 제복 차림). 아들 진은 일본에 돌아가기 직전인 5월 7일에 숨졌다.

이후 일제는 떠났지만 벚꽃놀이는 남았다. 대관람차와 유람차 등 놀이기구도 들어왔다. 60년대와 70년대 4월, 보온병에 김밥을 싸 들고 몰려나온 시민들은 장서각을 오르는 길부터 자리 전쟁이었다. 솜사탕과 번데기 봉투를 든 꼬마, 손목에 색색의 풍선을 실로 매단 소녀, 양산을 든 여인들, 호객하는 사진사들이 뒤엉켜 바글거렸다.

80년대 초반 대학생들 사이에 이른 바 창경원 ‘나체팅’이 유행했다. 나체팅은 ‘나이트 체리블로섬 미팅(밤벚꽃 미팅)’의 준말이다. 하루 2만 명이 몰리던 시절이었다. 83년 12월 31일 창경원은 문을 닫고. 3년 공사 뒤에 창경궁으로 다시 태어난다. 50여 년 봄밤을 밝힌 왕벚나무들은 여의도 윤중로로 이사를 갔다. 왕벚나무가 일본산이 아니라 우리 토종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벚꽃축제는 국민잔치가 됐다. 요즘 한강변, 섬진강변, 경주와 진해 등 전국이 벚꽃 반 사람 반이다.

이상국(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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