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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남성우월 시각이 만든 ‘음탕한 천추태후’

세상을 바꾼 여인들

이덕일 지음, 옥당, 528쪽, 1만8900원



고려 경종의 비 헌애왕후(964~1029)를 소재로 한 드라마 ‘천추태후’(KBS 2TV)의 한 장면.
 율곡 이이가 쓴 ‘나의 어머니 일대기’(先<59A3>行狀)에 따르면 신사임당은 결혼 후 19년 동안 시댁에서 살지 않았다고 한다. ‘신사임당=현모양처 ’라고 여겨온 이들이라면 적잖이 놀랄 얘기다. 사임당은 결혼 후에도 외가이자 사실상 친정이던 강릉에 머물며 부친의 삼년상을 치렀다. 뿐만 아니다. 시어머니 얼굴을 처음 본 것도 혼인한 지 3년이 지나서였고, 시댁이 있는 서울에 정착한 것도 혼인 19년 만이었다. 신사임당은 “현모는 몰라도 양처와는 큰 거리가 있었다.” 이 책의 지은이의 말이다.



이 책은 이렇게 우리가 알고 있었던, 혹은 몰랐던 역사 속 여성들 25인의 삶을 새롭게 조명한다. 대부분 남성에 종속된 삶을 거부했던 여성들이다. 역사학자인 저자는 풍부한 사료를 근거로 제시하며 조목조목 재추적했다.



사임당 얘기로 돌아가 보자. 사임당이 친정에 오래 머문 것은 당시의 성리학적 질서에 반하는 일이었다. 저자는 신사임당이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각인된 것은 아들인 율곡의 덕이었다고 풀이한다. 후에 유학자들이 외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이이를 추앙하면서, 이이와 신사임당을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고려 천추태후(‘임금 위에 군림한 여인들’편), 신라 선덕여왕과 진성여왕(‘천하를 경영한 제왕들’편)도 업적보다는 ‘음녀’(淫女) 라는 등 부정적인 이미지로 얼룩졌다며 이는 남성우월주의에 의한 편견으로 왜곡된 것이라고 말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선덕왕조에서 “어찌 늙은 할미가 규방에서 국가의 정사를 재단하겠는가?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난세의 일이며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고 적었을 정도다.



과거에 거듭 낙방하고 기방에 출입하는 남편 때문에 눈물짓던 허난설헌(‘피안으로 향한 군자들’편)에게 시(詩)는 저항의 무기였다. “누가 술 취해 말 위에 탔는가/흰 모자 거꾸로 쓰고 비껴 탄 그 꼴…”이라며 색주가 남편을 조롱했다. 나아가 그녀는 “양반댁의 세도가 불길처럼 성하던 날/…/가난한 이웃들은 헐벗고 굶주려/주린 배를 안고 오두막에 쓰러졌네”라며 빈자들이 겪는 불평등을 꼬집었다. 그녀가 쓴 ‘가난한 여인을 읊음(貧女吟)’이란 시는 “여성억압과 가난이 같은 문제임을 간파한 경지”를 보여준다.



화가 나혜석(1896~1948·‘시대를 앞서간 선구자들’편)은 ‘삶이 곧 페미니즘’인 예술가였다. 그녀는 30년 6월에 ‘삼천리’라는 잡지의 기고문을 통해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실험결혼론’을 주장했다. 34년에는 ‘이혼고백서’를 통해 당시 금기시 돼있던 여성의 성욕을 거론했으며, 자신들은 정조를 지키지 않으면서 여성들에게만 요구하는 남성들의 이중성을 통렬히 비판했다.



지은이는 “모든 역사는 남성들이 썼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여성들의 삶이 실제 삶보다 그 의미가 축소돼 알려졌을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이 책을 ‘여성과 남성이기 이전에 인간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바친다고 했다.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천명한 것이다. ‘감성’이나 ‘이론’이 아니라, 철저히 역사적 현장에서 퍼올린 페미니즘이라서 더 반갑고, 이야기는 생생하게 다가온다. 적잖은 인물을 한 권의 책에 함께 소개하면서도, 탄탄한 사료를 보태 긴장감을 담아냈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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