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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 불은 심판이 아니라 천국운동의 불씨였다

예수는 이 세계를 불사르고 싶었던 혁명가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 이전에 이미 이 세계를 혁명코자 했던 역사적 인물이 있었다. 예수는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바로 세례요한이었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바로 세례요한의 목이 잘린 마캐루스 성채이다. 사해 위로 석양의 태양이 이글이글 마지막 빛을 발하고 있다. 임진권 기자
제10장
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이 세상에 불을 던졌노라. 그리고 보라! 나는 그 불이 활활 타오를 때까지 그 불을 지키노라.”

79. 불씨와 세상

1 Jesus said, “I have cast fire upon the world, and look, I am guarding it until it blazes.”

시대를 앞서간 저항시인 신동엽(申東曄· 1930~1969)이 죽기 직전에 쓴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초가을, 머리에 손가락 빗질하며
남산(南山)에 올랐다
팔각정(八角亭)에서 장안을 굽어보다가
갑자기 보리씨가 뿌리고 싶어졌다.
저 고층 건물을 갈아엎고
그 광활한 땅에 보리를 심으면
그 이랑이랑마다 얼마나 싱싱한
곡식들이 사시사철 물결칠 것이랴.

요즘같이 세상이 비관적으로 느껴지는 세태 속에서는 남산에 올라가 서울을 내려다보면 다 갈아엎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더벅머리를 버걱버걱 손가락 빗질하는 사람치고 그런 생각 안 드는 자가 드물 것이다. 물론 신동엽의 사상에는 그런 푸념보다는 더 본질적인 문명의 거부가 있고, 푸른 보리가 물결치는 이랑이랑에로의 복귀가 있다. 그가 노자(老子)의 무위(無爲)사상을 접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반문명적인 전복(subversion)의 심보가 고층건물들이 갈아엎이는 전도의 순간에 깃들어 있다.

이곳이 세례요한이 갇혀 있었던 동굴 감옥이다. 마캐루스 성채의 가파른 절벽 중간에 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여 우리는 그 사실을 확증할 수 있다. 헤롯은 예수의 이름을 들었을 때 자기가 죽인 세례요한이 부활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는 남산 팔각정에 올라가서 보고는, 고층건물을 갈아엎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사그리 불살라버리고 싶다고 말한다. 예수의 말에는 분명 전복의 폭력성이 깃들어 있다. 예수는 신동엽보다는 확실하게 더 격렬한 혁명가였다. 이 세상을 불살라 버리겠다는 이 예수의 말은 과연 무엇일까? 이 글을 읽는 경건한 신도들은 이것은 도마복음 외경의 말이니 예수의 말이 아닐 것이라고 안위할 것이다. 그러나 누가복음 12장 49절을 펴보라!

나는 불을 이 땅에 던지러 왔노라. 불이 이미 지펴졌다면 내가 무엇을 더 바라리오.
49절의 뒷 구절은 좀 애매하게 개역판에 번역되어 있는데 희랍어 원문을 직역하면, “그것이 이미 지펴졌기를 얼마나 내가 바랐는가!”의 뜻이 된다. 공동번역은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로 되어 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불을 이땅에 던지러 왔는데, 불은 아직 타오르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이 누가복음의 구절을 온전하게 이해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그 다음엔 이런 말이 나온다: “나는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내가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다!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다.”

“받아야 할 세례”(a baptism to be baptized with)는 특별히 달리 해석할 도리가 없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 10:38에는 예수가 그의 수난을 예견하면서 이와 같이 말한다: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겠느뇨?” 여기 ‘세례’는 분명 종말론적 문맥에 놓여 있다. 따라서 이 세례의 종말론적 맥락에 따라 누가복음에 있는 ‘불’도 종말론적 심판(judgement)으로 해석되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심판의 불을 이 세상에 던지러 온 권능자인 예수가 왜 “불이 지펴지기만 한다면 오죽 좋으랴”라는 식의 부정적인 멘트를 가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가 명료하게 해석될 길이 없었다.

그런데 누가 12:49~53의 내용은 마태 10:34~39에도 나오며, 따라서 이것은 큐자료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마태에는 누가의 ‘분쟁’(division·디아메리스몬)이 ‘칼’(sword·마카이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불에 관한 이야기가 마가 자료에는 생략되어 있다. 본시 큐자료에는 이 불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고 사료된다. 불에 관한 이야기는 큐복음서와 도마복음서에 공통된 자료였던 것이다.

이제 다시 도마복음 제10장을 살펴보자! 누가는 “불을 던지러 왔다”로 되어 있지만 도마에는 “왔다”가 없다. “왔다”는 것은 “밖에서 이 세상으로 왔다”는 뜻이며 이미 심판적 의미가 들어가 있다. 그러나 도마에는 그런 이방인적 심판자의 자세가 없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세상에 이미 불을 던졌다”로 되어 있는 것이다. 현재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처럼 불이 안 타오른다고 애타게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도 없다. 그러니까 도마의 ‘불’은 결코 이 세계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불’은 ‘생명의 불’일 수도 있고, ‘양심의 불’일 수도 있고, 어둠에 대한 ‘밝음의 불’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불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오늘날의 대형 교회 집사·장로님과도 같은 권세가들이나 정권에 협력하는 권력자들이 아니라 갈릴리 농촌의 연약한, 소외당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사명은 그 불이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그 불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이었다. 그가 던진 것은 실상 이 세계를 일시에 초토화시킬 수 있는 심판의 불이 아니라 작은 천국운동의 불씨였다. 그 불씨가 훨훨 타오르도록 예수는 그것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불은 그냥 꺼져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불이 훨훨 타오르면 이 세계를 불살라버리고 말 것이다. ‘불사름’의 사상에는 혁명의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가 말하는 혁명은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기존의 가치를 전도시키는 혁명’이었다. 그것은 기존의 평화를 유지하는 안일한 혁명이 아니라 분쟁과 칼을 선사하는 혁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에 묵시론적 환상처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불씨가 잘 지펴지어 타오르듯 점진적으로 완성되어지는 것이다. 마오쩌둥도 한때 이런 말을 했다: “별똥 같은 불씨가 거대한 평원을 사르리라”(星星之火, 可以燎原). 예수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한 것이 아니라 천국운동의 현실적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그것이 누가에서는 종말론적으로 해석된 것이다. 물론 도마복음이 보다 더 오리지널한 자료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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