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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시시각각] 터널의 끝?

북한 체제의 장래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패망한 일본 군국주의 체제를 떠올린다. 일본의 침략적 제국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 일제가 망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억압과 수탈에 기반한 비정상적 체제가 영구히 지속될 순 없겠지만 그래도 가까운 장래에 붕괴하진 않으리란 체념적 전망이 우세했다. 일제의 패색이 짙어지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환상의 끈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긴 터널에도 끝은 있다.



 국제정세 분석에 정통한 것으로 유명한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장장 14쪽에 걸친 한반도 특집기사를 최신호에 실었다.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미국발 금융위기의 한복판에서 이코노미스트가 한반도를 집중 조명했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다. 국별로 돌아가며 연재하는 스페셜 리포트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게는 위기를 예고하는 ‘탄광 속 카나리아’의 울음소리처럼 들린다.



이코노미스트는 북한은 더 이상 과거의 스탈린주의적 폐쇄사회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식량난 때문에 암시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국경을 통한 중국과의 비공식 교역이 급증하면서 바깥세상의 현실에 눈을 뜬 북한 사람들이 크게 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북한 체제는 주민들의 행동을 과거처럼 엄격하게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어느 탈북자는 며칠 전에도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돈을 보냈다. 브로커가 지닌 휴대전화를 통해 가족은 “우리는 잘 버티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단단해 보이는 북한 체제 곳곳에 ‘돈구멍’이 송송 뚫려 있다.



북한 체제가 현 상태로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이상 관련국들의 정책은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를 결합해 북한의 연착륙을 유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주장한다. 그 일환으로 북한 주민을 겨냥한 단파 라디오 방송을 강화하고, 남한 내 탈북자들을 훈련시켜 급변사태 때 도우미로 활용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 북한의 관료와 학생들에게 외국 방문과 유학 기회를 최대한 제공함으로써 시대착오적인 북한 체제의 끝이 멀지 않았음을 자각토록 하는 동시에 체제 붕괴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줘야 한다는 충고도 하고 있다.



도둑처럼 해방이 왔듯 북한 체제의 붕괴도 순식간에 올 수 있다. 혼란과 부담이 걱정된다고 우리가 피하거나 늦출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급변사태에 대비하는 것은 정부의 책무다. 대비책을 다듬고 손질하는 일에 정부는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한다. 다만 드러내놓고 해선 안 된다. 하는 듯 마는 듯 치밀하게 대비하는 허허실실의 자세가 최선이다. 이 점에서 정부는 너무 미숙해 불안하기 짝이 없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건강 이상설에 대해 정부는 해서는 안 될 말을 너무 많이 했다. “혼자서 양치질을 할 수 있는 정도의 건강 상태”라는 말이 도대체 어떻게 정부 관리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가.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맞다면 정보망의 와해가 불가피할 것이고, 틀린다면 정보망의 허점을 자인하는 꼴이다. 입을 다물고 있는 미국이나 중국과 너무 대조적이다. ‘작계 5029’니 ‘충무계획’이니 하는 급변사태 대비책을 내놓고 거론하고 있는 것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급변사태를 피할 수 있는 최선의 시나리오는 북한 스스로 핵을 포기하고, 과감한 개혁·개방에 나서는 것이다. 그리고 남한과 국제사회의 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여 북한판 두바이를 만들고, 북한판 푸둥을 건설하는 것이다. 체제 수호라는 허울뿐인 명분 아래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북한의 집권 엘리트층의 결단에 달린 일이다. 정부는 핵 포기와 개방만이 그들이 살길임을 알리고 설득하는 한편으로 급변사태의 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준비 없이 온 해방이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졌듯 준비 없는 급변사태는 또 하나의 민족적 비극일 수 있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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