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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60주년] 농지개혁…땅 갖게 된 농민 ‘대한민국 국민’ 정체성도 갖게 돼

“1949년 6월 이승만 정부가 농지개혁을 공포했는데, 지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습니다. 장인이 대구의 천석꾼으로 한국민주당의 지역 간부를 맡고 계셨는데 ‘농지를 이승만에게 뺏겼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용만 당했다’며 앓아 누우셨습니다. 정부에 진정서를 내겠다며 상경하는 지주들도 있고, 망연자실 정신을 놓고 거리를 헤매는 사람도 봤어요. 지주들이 목을 매달거나 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풍문도 나돌았습니다.”



“덕분에 쌀밥 먹게 됐다” 이승만 지지층 많아져
거래 늘어난 지가증권, 산업자본 탄생 밑거름

당시 기획처 사무관으로 근무했던 이선희(88) 경제기획원 전 차관보의 증언처럼 농지개혁에 대한 지주들의 반발은 대단했다.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한민당의 배신감도 컸다. 하지만 이승만은 집권 전부터 농지개혁이 최우선 과제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48년 3월 20일 친구이자 정치고문인 로버트 올리버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단 정부를 수립하면 (그동안 우리를) 한국의 파시스트, 반동세력 혹은 극우파라고 지탄하던 사람들은 우리가 이 나라를 얼마나 자유화하는가를 보고 놀랄 것입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처리할 과제는 농지개혁법입니다’라고 밝혔다.







◇대한민국 국민 만들기=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은 진보적인 조봉암과 강정택을 농림부의 장·차관으로 기용했다. 평소 농지개혁을 역설해온 조봉암을 발탁한 이유에 대해 이승만은 올리버 박사에게 ‘농민을 장악하기 위해서’(48년 8월 4일자 편지)라고 설명했다. “공산혁명을 막기 위해서라도 시급히 농지개혁을 해야 한다”(서울신문 48년 12월 7일자)고도 주장했다.



당시 남한 인구의 70%가 농민이었다. 그중 80%가 소작농이었다. 이들은 소작지를 쥐고 있는 지주(한민당)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웠다. 심정적으로는 무상몰수·무상분배 방식의 농지개혁을 부르짖는 좌파(남로당)에 동조하고 있었다.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는 “이승만이 추진한 농지개혁은 한민당과 남로당의 영향력 아래 있던 농민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고도의 정치행위”라고 평가했다.



49년 6월 의회가 통과시킨 농지개혁법에 대해 정부가 수정안을 제출해 50년 3월 개혁안이 최종적으로 공포됐다. 주요 내용은 ▶농지의 소유 상한은 3정보(약 3만㎡) ▶초과 농지는 유상매입·유상불하 ▶지주에게 평년작의 150%를 지가증권으로 지급 ▶농민은 30%씩 5년간 분할 상환 등이었다. 49년부터 실질적인 행정절차에 들어간 농지개혁은 한국전쟁 전까지 대상 농지의 70~80%를 분배할 정도로 순조롭게 이뤄졌다. 그 결과 해방 직후 농지의 65%나 차지하던 소작지는 51년 8%까지 줄어들었다.



유영익 연세대 교수는 “농지개혁은 역대 임금이 여러 번 시도했으나 조선 태조의 과전법 이후 한 번도 성사시키지 못한 어려운 과제”라며 “소작료의 중압과 경작권의 불안정성에서 해방된 소농들은 ‘이 박사 덕분에 쌀밥을 먹게 되었다’며 점차 이승만의 지지기반이 되어 갔다”고 평가했다.



당시 전북 김제군 봉남면에서 농민운동을 했던 송방용 헌정회 전 회장은 “소작농들은 ‘노예지 국민이 아니다’고 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일자무식에 한 끼 해결하기도 급급한데 나랏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나. 그런 시절에 농지개혁은 일대 혁명이요, 일대 진전이었다. 땅을 가진 소작농들은 자식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농지개혁은 암울한 과거를 딛고 오늘의 풍요를 일군 밑천”이라고 말했다.



김일영 교수는 “농지를 받은 농민은 이승만의 지지기반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구성원으로 포섭되었다”며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만든 첫째 계기가 농지개혁”이라고 주장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땅을 갖게 된 소작농들은 한국전쟁 동안 북한의 선전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충실히 남을 수 있었다.







◇한국 자본주의 태동=농지개혁법은 제8조에서 ‘(지주가) 지가증권을 기업자금에 사용할 때 정부는 융자를 보증한다’고 규정했다. 지주자본을 농업 관련 사업과 중소기업에 대한 투자로 유도해 산업구조를 재편하기 위해서였다. 서울신문 48년 12월 10일자에 따르면 이승만은 “지주들에게 토지를 내놓게 하는 대신 그들이 상당한 자본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주장했다. 김일영 교수는 “이승만은 토지에 묻혀 있는 대부분의 자본을 하루빨리 공업화로 전용하고 싶어했다. 그가 원한 것은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였다”고 분석했다.



유영익 교수는 “정부는 지주가 산업자본가로 전업하길 원했지만 이 조항에 근거해 융자를 신청, 사업에 성공한 사례는 20건에 불과해 정부가 원래 기대했던 효과는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종수 헌정회 원로의회 부의장은 “지가증권을 받은 직후 전쟁이 터진 데다 급격한 인플레이션까지 겹쳐 가치가 폭락했다”며 “속상해하던 차에 동생이 재직하고 있던 동아대 총장의 요청을 받고 지가증권을 대학에 기증했다”고 말했다.



지가증권이 지주들에겐 애물단지였지만 귀속재산을 불하받으려는 신흥기업가들에겐 유용했다. 귀속재산 매입 대금을 치를 때 액면 전액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피난 보따리 속에서 뒹굴던 지가증권이 액면가의 25~70%(평균 50%)로 매매되기 시작했다.



송방용 전 회장은 “피란 시절 모 대학 창립자의 부인은 고향에서 지가증권을 싸게 사들인 뒤에 부산에서 웃돈을 받고 되파는 지가증권 장사를 해 그 수익을 학교기금에 보태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활발해진 지가증권 거래는 본격적인 증권시장을 태동시켰다. 49년 11월~55년 5월 증권회사 총거래액 107억여원 가운데 73%인 78억여원이 지가증권이었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이처럼 지가증권 거래를 통해 비록 우회적이긴 하나 적지 않은 지주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됐다”고 설명했다.



 ◆특별취재팀=배영대·원낙연·임장혁 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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