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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알리러 평양 간 소련 외무장관 북 냉대에 4개월 앞당겨 “수교” 발표

“롤렉스 금딱지 시계, 크리스찬 디올 넥타이를 보는 순간 ‘이야기가 잘 되겠구나’ 생각했죠.”



한 · 소, 한 ·중 수교 뒷얘기

1990년 6월 샌프란시스코 한·소 정상회담 1시간30분 전 마실리코프 옛 소련 경제부총리와 처음 마주앉은 김종인 청와대 경제수석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고 했다. 소련 측 대표의 서구화된 외모에 경협 카드를 잘 활용하면 수교 협상이 잘 풀려나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마실리코프는 수교에 앞서 경협부터 하자고 제안했다. 이후 협상은 경협이 먼저냐, 수교가 먼저냐를 두고 밀고당기는 승강이의 연속이었다.



연필 한 자루만 들고 정상회담에 나타난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도 “양적인 발전을 통해 질적인 성장으로 양국 관계를 확대하자”며 경협 우선을 강조했다. 8월 2일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1차 실무협상에서도 소련은 경제 지원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우리 정부는 “돈을 주고 수교했다는 비판이 나오면 양측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펴며 ‘선(先)수교 후(後)경협’을 주장했다. 결국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결단으로 9월 30일 수교가 먼저 이뤄졌다.



한·소 수교 뒤 1990년 12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이 모스크바 크렘린궁 회의실에서 열린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에 앞서 소련 측 회담 관계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당시 경협 규모와 관련해 우리 정부 계획에 차질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고르바초프에게 “경협 의사가 있다”고 밝힌 것을 통역이 ‘수십억 달러 규모(several billion) 의 경협’으로 말을 덧붙였다는 것이다. 우리 측은 당초 수억 달러의 경제 지원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소련 측이 이후 협상에서 이 발언을 물고 늘어졌다. 91년 초 서울에 온 로가초프 외무차관은 유엔 가입을 앞두고 있던 우리에게 “(수십억 달러의 지원을 약속하지 않으면) 돌아가겠다”며 압박하기도 했다. 결국 30억 달러(실행된 지원은 현금차관 10억달러, 상품차관 4억5000만 달러) 규모를 지원키로 합의됐다. 수교 시점은 당초 91년 1월 1일로 합의됐었다. 그러나 수교 사실을 북한에 통보하기 위해 90년 9월 평양을 찾은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이 김일성 주석도 못 만나는 등 냉대를 당하자 소련이 수교를 4개월 앞당겨 버렸다.



한편 한·소 수교 논의가 급진전을 보이던 시기에 중국이 김종인 수석을 초청했다. 중국 공산당의 한 원로급 인사가 “당신네들 일하는 것을 보니 천둥번개가 치고 멀리서 시커멓게 먹구름이 몰려오는데 정작 비는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는다”며 비꼬았다고 한다. 여러 경로로 수교 제의 메시지를 전해오지만 핵심을 찌르지 못하는 것을 지적한 말이었다.



그러던 차에 90년 10월 중국을 방문한 슐츠 전 미 국무장관을 통해 노 대통령의 메시지가 중국 측에 전달됐다. 슐츠 전 장관은 중국에서 덩샤오핑 등 최고위층에 한국과의 수교를 권유했다고 한다. 그러자 중국은 11월 서울에서 열린 아태경제협력체(APEC) 외무장관 회담에 첸치천 외교부장을 파견해 수교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정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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