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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중과 수교 없었으면 한국 경제 이만큼 발전 못 했을 것”

7일은 우리나라가 소련·중국·동유럽 각국과 수교를 추진하겠다고 선언한 ‘7·7 선언’(민족 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이 발표된 지 20주년 되는 날이다. 이른바 ‘북방정책’으로 불리는 노태우 전 대통령 정부의 외교정책은 서방 일변도였던 우리의 외교 영역을 지구 전체로 확대함으로써 우리의 국제위상을 크게 높일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로 평가된다. 최근 6자회담 진전과 남북관계 경색 등으로 우리의 외교안보 정책에 대한 관심이 새롭다. 이홍구 본사 고문의 사회로 북방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한 김종휘(외교안보), 김종인(경제) 전 청와대 수석으로부터 당시 상황을 들어봤다. 편집자



7·7선언 20주년 좌담회
주위 말 듣는 노태우 전 대통령 스타일이 장점 작용
대북관계 주도권 쥔 당시와 달리 요즘엔 끌려다녀

‘7·7선언’ 20주년을 맞아 당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했던 책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본사 이홍구 고문(전 국무총리, 노태우 정부 당시 국토통일원 장관, 中)이 김종휘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左,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右에게 북방외교를 추진한 배경을 질문하고 있다. [사진=김형수 기자]


▶이홍구 본사 고문:북방정책을 추진한 배경은 뭔가.



▶김종휘 전 외교안보수석:당시 국제질서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진행된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미·소관계나 동유럽의 변화에 비해 아시아, 특히 한반도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노태우 대통령이나 청와대 참모들은 머지않아 동북아에서도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 변화에 대비하기 위해 외교와 평화와 번영과 통일을 종합적으로 연관시키는 7·7 선언을 하게 됐다.



▶김종인 전 경제수석:1985년 고르바초프가 옛 소련 실권을 장악한 후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성공적으로 진행할 경우 독일 통일로 연결될 것으로 짐작했다. 89년 5월 서독 정치인들에게 “독일이 통일될 것 같다”고 했더니 “불가능하다”며 관심을 안 보이더라. 결국 독일 통일은 서독이 미처 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뤄졌다. 북방정책은 소련과 중국과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북한을 개방토록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홍구:북방정책의 목표와 성과는.



▶김종휘:북방외교의 목표는 우선 미국·일본·유럽 등 서방 중심이었던 우리나라의 외교 영역을 사회주의권까지 확대한다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는 유엔 가입이 목표였다. 경제분야에서도 서방국가들과만 교류하는 반쪽이어서 중국과 러시아라는 방대한 시장을 확보해야만 했다. 또 북한의 최대 지원 세력인 러시아·중국과 관계 개선을 함으로써 안보를 강화하고 평화를 증진시킬 필요도 있었다. 실제 북한이 최신 미그 전투기 30대를 구입하려 했는데 한·소 수교로 들여가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통일을 위해 주변 강대국의 지지가 필요한데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대화는 필수라고 생각했다.



▶김종인:노태우 대통령은 운이 좋았던 분 같다. 우리 경제가 서방 한쪽으로만 가서는 발전하는 데 한계가 있다. 결과론이지만 중국과 수교가 없었으면 한국 경제가 어떻게 됐을까. 중국과 매년 240억~250억 달러의 흑자가 나는데 이것이 90년대 말 외환위기 극복에 큰 기여를 했다. 북방정책 추진 20년 만에 유엔 사무총장을 한국에서 배출한 것도 북방정책의 성과다.



▶이홍구:국제정치 상황이 변했어도 그동안 적대적 관계였던 나라들과 수교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김종휘:당시는 중국과 먼저 수교해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소련은 KAL기 격추 사건으로 우리에겐 먼 나라로 인식됐다. 그러나 청와대 생각은 달랐다. 중국은 북한과 관계가 밀접해 설득하기 어렵다고 봤다. 마침 소련은 경제난으로 지원에 목말라 있었다.



▶이홍구:북방정책은 획기적인 정책이었다. 그만큼 국민의 지지가 없었다면 억지로 추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87년 대선에서 36.7%라는 낮은 지지도로 당선됐고, 13대 총선 결과도 여소야대의 상황이었다.



▶김종인:김영삼·김대중 당시 두 야당 총재들은 동유럽은 물론이고 소련·중국·북한과도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해 오던 분들이니 북방정책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김종휘:무엇보다 노태우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과 정책적 이슈 선점이 성공 배경이었던 것 같다. 노태우 대통령은 보좌진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여담이지만 노태우 대통령은 식사 자리에서 “나는 이름부터 큰(泰) 바보(愚)니 당신들이 많은 의견을 내달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귀를 열고 정책을 폈다. 그 덕분에 당시 정부는 전향적인 북방정책·남북정책·대미정책으로 이슈를 선점할 수 있었다. 서울 용산기지 이전 문제, 평시작전권 문제, 핵사찰 문제 등이 좋은 예다. 오히려 야당과 운동권이 뒤쫓아오던 상황이었다.



▶이홍구:김대중 정부 들어와 북방정책과 유사한 햇볕정책이 나왔다. 이를 평가한다면.



▶김종휘:햇볕정책과 북방정책은 북한을 국제사회로 끌어내고 남북교류에 응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목표는 같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다. 우선 북방정책은 북한이 대화의 장에 나오도록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강압을 했다. 햇볕정책은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교류하면 북한이 언젠가 변하지 않겠느냐는 장기적으로 기다리는 정책이다. 그런 면에서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정책이다. 또 북방정책은 한반도 문제 해결을 우리가 주도했다는 점에서 햇볕정책보다 더욱 자주적이었다. 미국에 대화를 위한 여건 조성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핵문제도 우리가 다루겠다고 했다. 그래서 비핵화 공동선언도 우리가 하고, 핵사찰도 우리가 하겠다고 했다. 상호주의도 차이점이다. 당시 이인모 노인을 보낼 용의가 있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동진호 납북 어선의 어부 몇 명이라도 돌려보내는 등 상응조치를 북한에 요구했다.



▶이홍구:향후 우리 외교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나.



▶김종인:핵문제 논의과정에서 지난해 초부터 미국과 북한이 직접대화를 시작한 이후 우리는 따라가는 입장이 돼 버렸다. 국민소득 2만 달러가 넘는 나라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중국과 북한, 미국이 하는 것을 따라가는 식이 돼선 안 된다. 우리가 이니셔티브를 찾아오지 못하면 나중에 경제적 부담만 지게 될 것이다.



▶김종휘:북방정책을 추진할 당시보다 우리 경제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북한과의 경제격차도 7대 1에서 30대 1 이상으로 벌어졌다. 그러나 남북대화의 이니셔티브는 북한이 쥐고 있지 않나. 핵문제에 있어서도 미국과 북한이 주도하고 있다. 북방정책 과정에서 한·미 공조는 어느 때보다 잘 됐다. 우방이 알아야 할 일은 사전에 알려준다는 방침이 있었다. 그래서 미국도 아무런 걱정없이 협조할 수 있었다.



정리=정용수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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