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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스트의 땅인가, 제국의 희생양인가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간 파키스탄계 영국인 청년 4명이 탈레반 전사로 의심받아 미군에게 체포된 뒤의 과정을 그린 영화 ‘관타나모로 가는 길’.
스크린에서 아프가니스탄처럼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는 국가가 또 있을까? 무지한 동양의 신비주의 국가에서, 미국의 우방으로, 그리고 탈레반이라는 반인권적 테러 국가를 거쳐 최근 전쟁의 피해국으로까지. 아프가니스탄의 정체성은 보통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급변했다. 세계에 비친 아프가니스탄의 모습은 물론 서구인들이 주로 만들어낸 것이다. 정체성이란 게 본인의 의지와 외부의 시선 사이의 긴장의 결과라고 본다면, 아프가니스탄의 정체성은 지나치게 외부에 의해서만 재단돼온 편이다. 그것도 주로 부정적으로 말이다.
 
타자가 규정한 야만 혹은 우방
아프가니스탄이 스크린에 주요하게 등장한 것은 미국의 존 휴스턴 감독이 만든 ‘왕이 되려고 한 사나이’(1975) 때부터다. 러디어드 키플링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두 명의 퇴역 영국 군인이 별의별 모험을 다 겪은 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왕이 됐다가 몰락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때는 19세기 말, 제국주의가 극성을 부릴 때다. 존 휴스턴은 키플링의 소설을 이용하여 반제국주의적인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군인들이 신식 무기를 이용하여 지역의 추장들을 왕으로 만든 뒤, 그들을 쓰러뜨리고 자신들이 스스로 왕이 되는 야비한 정벌의 과정은 영국과 프랑스 등 제국들이 아시아에서 보여준 모습 그대로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반제국주의의 테마가 전개되는 데 희생되는 것은 전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국가와 사람들이다. 이들은 무지하고 신비주의에 빠져 있는 문명 이전의 야만인에 가깝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기 위해 인용했던 유명한 말, 곧 마르크스가 말했던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한다”는 유럽인의 편견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야만과 무지가 잉태한 아프가니스탄의 불행은 영국이라는 문명국의 지배를 받아서라도 치유해야 할 대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런 야만스러운 국가가 숭고의 대상으로까지 돌변하는 데는 할리우드의 극우 영화 ‘람보3’(1988)의 역할이 컸다. 영화의 배경은 소련이 점령한 아프가니스탄이다. 냉전시대에 만든 영화답게,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소련군들에 핍박받는 희생자들로 나온다. 하지만 이들은 절대로 소련에 굴복하지 않는 불굴의 영혼을 가진 용사들이다. 미국 장교는 “이들은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이길 수는 없다. 빨리 깨달아야 한다”라며 소련군에 조언까지 한다. 지금은 거꾸로 미국이 자주 듣는 조언이기도 한데, 외지인의 지배에 절대로 무릎 꿇지 않는 강인한 영혼의 소유자들이 바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영화가 끝날 때면 “이 영화를 아프가니스탄의 용감한 국민들에게 바친다”라는 자막까지 뜬다. 야만의 나라 아프가니스탄이 졸지에 미국의 우방이자 존경의 대상으로 격상되는 것이다.
 
탈레반이 군림하는 지옥
‘람보3’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적어도 영화에서는 그 모습을 감추었다. 동유럽권 몰락의 시대이자 걸프전쟁의 시대에 중앙아시아의 조그만 나라가 주목받을 만한 이유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이 다시 스크린에 등장한 것은 탈레반 때문이다.
이란의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이 만든 ‘칸다하르’(2001)가 기폭제가 됐다. 아프가니스탄이 세상에서 잊혀져 있는 사이 그곳에는 탈레반이라는 정부가 들어섰고, 이들의 꽉 막힌 종교적 근본주의 때문에 세상은 바로 지옥으로 변했다고 영화는 말한다.

특히 ‘칸다하르’는 9·11테러가 일어나기 전에 제작된 작품이라, 곧 이어 전개될 비극을 예언한 것 같아 더욱 눈길을 끌었다. 이어서 탈레반의 전횡과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비극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 발표된다. 아프가니스탄 출신 감독이 만들었다고 해서 비상한 주목을 받았던 ‘천상의 소녀’(2003)가 바로 그 작품이다. 9·11 이후 자국인이 만든 최초의 작품으로 소개된 이 영화는 ‘부르카’(여성들이 입는, 전신을 가리는 옷) 속에 구속된 여성들의 불행을 고발하여 탈레반에 대한 전 세계인의 분노를 끌어냈다.

그런데 탈레반을 직접 다룬 ‘천상의 소녀’는 반(反)탈레반이라는 입장은 두드러지지만, 아프가니스탄의 지금에 대해선 별 말이 없어 아쉬움을 남겼다. 이 영화는 자국민 감독이 만들었고, 탈레반이 권력에서 물러난 뒤 발표된 것이어서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짐작하게 하는 무엇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영화의 내용은 과거에 탈레반들이 휘둘렀던 독재권력을 고발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최소한 지금의 카르자이 친미정부에 대한 단 한 조각의 의견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 ‘칸다하르’와 ‘천상의 소녀’ 두 영화를 통해 드러난 아프가니스탄의 모습은 탈레반이라는 반인권적 권력이 군림하는 지옥으로 인상지어졌다.
 
미국에 짓밟힌 희생자
최근 들어 조심스럽지만, 아프가니스탄이 과거에 소련의 침공으로 피해를 겪었듯, 지금은 서구의 강국에 의해 특히 미국에 의해 비극을 겪고 있다는 시각이 나오기 시작했다. 역설적이게도 그 첫 문제작은 미국인 감독 마이클 무어가 만든 ‘화씨 9/11’(2004)이다. 알려져 있듯 그는 반(反)공화당주의자이다. 부시 대통령을 공격하는 데 팔을 걷어붙인 그는 미국이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곧이어 이라크를 폭격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니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 희생된 무고한 국가라는 것이다. 이는 최근 개봉된 ‘관타나모로 가는 길’(2006)에서도 반복되는 시각이다. 영국인 감독 마이클 윈터바텀은 미국인들이 다른 문화에 대해 무지하며, 그런 몰이해가 비극을 불러왔다고 고발한다. 아프가니스탄에 죄가 있다면 서구 강대국들이 싫어하는 ‘다른’ 문화를 갖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동양의 야만 국가에서, 소련에 저항하는 용감한 우방 국가로, 그리고 탈레반의 테러 국가에서 강대국의 희생자로, 아프가니스탄의 모습은 여전히 자국인들의 의지와 별 상관없이 외부인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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