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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9)<제89화>내가 치른 북한 숙정(21)|저내무성부상 강상호

시인 임화에 이어 이태준·김남천·이원조 등 문인그룹과 작곡가 김순남·연극인 황철 등 월북 예술인들이 무더기로 검거돼 조사를 받았다.
「문화혁명」식으로 소부르좌 사상과의 투쟁이라는 간판밑에 남로당파의 월북 예술인들을 말살하는 숙청작업의 일환이었다.
이 숙청작업이 있기전까지만해도 김일성수상을 비롯, 당·정고위인사들 대부분이 소속 정파를 초월해 이태준·김순남·최승희등 세 사람을『우리 한민족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천재적인 예술가들』이라며 공·사석을 가리지 않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나도 예술적인 소질은 없었지만 이들의 소설·시·희곡 등을 모두 읽었고 음악·무용발표회에도 빠짐없이 관람하는 「단골간부」중 한 사람이었다.
특히 이태준과 김남천의 해방전 작품은 말할 것 없고 공화국에 올라와 발표한 작품도 거의 탐독했다.
해방전 공청간부시절 조국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선배들이 몰래 갖고 들어온 이태준의 단편『복덕방』『돌다리』『봉선화』등을 밤새워 읽고 재소 고려청년들에게『우리조국에도 이런 훌륭한 작가가 있다』며 자랑하곤 했었다.
이태준은 1904년생으로 북만주와 철원에서 유년·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일본의 상지대학을 중퇴하고 해방전까지 자연주의 작가로 활동했다. 해방후 남조선에서 임화 등과 함께「조선문학건설중앙협의회」를 조직해 활동하다 월북했다.
월북후 한때 소련을 방문,「소련기행」과 중편소설『농토』를 발표해 공화국의 청년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특히 여성들의 문명퇴치사업을 내용으로 된 단편소설 『호랑할머니』 는 북조선 문단에서 부동의 지위를 구축했다.
그리고 그는 공화국의 문예총부위원장을 맡았다.
또 김남천은 경기도 출신으로 일제시대의 카프파에 속한 작품활동을 했다. 해방후 조선문학가동맹중앙위원을 지내다 역시 48년 월북했다.
북조선에 들어와 최고인민회의초대 대의원이 되었고 문예총 서기장에 등용되었다.
이 무렵 그는 북조선에서 최초의 단편소설『벌꿀(봉밀)』을 발표해 파문을 던졌다.
이들 월북예술인들은 박창옥(노동신문주필·당선전선동부장), 기석복(노동신문주필·당선전선동부부부장), 정률(문예총부위원장·문화선전성 부상·작가동맹기관지「문화전선」주필), 정국녹(「민주조선」주필·정전위 북측수석대표), 박길룡(조소문화협회부위원장·「조선문화」 주필·외무성부상) 전동혁(평론가·외무성참사)등 고려인 출신 문장가들과 종종 어울려 탁주를 마시며 일제하 조선예술인들의 항일투쟁 등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도 거의 빠짐없이 끼었다.
이들은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남조선에서의 추억을 회상하면서『우리는 봉건주의 잔재가 남아 있고 친일파들이 설치는 사회(남조선)에서는 주체성있는 예술을 진흥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상이 선진사상이고 사회주의 운동만이 예술의 본질을 살릴 수 있다는 신념으로 월북했다. 특히 우리의 이같은 진보적인 예술활동은 애국자 박헌영동지가 충분히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고 그를 따라 공화국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막상 올라와 보니 처음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크게 사정이 달랐다』며 자신들의 월북 자체를 후회하기도 했다.
이들은 특히『당이 모든 작품활동을 사상의 테두리속에 너무 맞추려 하다보니 예술활동이 억압 받게된다』면서『이런 환경에선 올바른 예술이 발전할 수 없다』고 친빨찌산파 찬양위주의 풍토에 노골적인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아울러 이들은『이제 공화국에서도 해외에서 빨찌산 운동을 했던 사람의 항일운동만 추겨 세우지 말고 국내의 일본놈들 밑에서 모진 탄압을 받으며 항일운동을 했던 국내파나 박헌영동지의 불굴의 애국정신도 함께 인정해 주는 풍토가 되어야 한다』는 등「박헌영 찬양론」도 잊지 않았다.
이들의 이같은 언행과 동향은 일부 고려인 간부와 월북예술인중 친수상계 인사들을 통해 당에 그대로 보고돼 차곡차곡 쌓여 갔다.
이들의 동향을 당고위층에 보고한 고려인 간부는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박창옥임이 틀림없다.
물론 그에 대한 똑 부러진 증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박창옥은 그들과 술자리 등이 있은 후 동무들에게 『남로당파 예술인들의 언행에 부화뇌동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등 석연치 않는 태도였다.
그는 이같은 2중적 태도 때문에 동무들로부터 따돌림받았다.
그리고 월북예술인들 가운데 친수상계는 당·정간부자리를 노리는「정치 예술인」들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환경속에서도 많은 월북예술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고 체념하면서 당생활과 작품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강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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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