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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1)<제9화>내가 치른 북한숙청(3)|전 내무성부상 강상욱|"「정치장교 소행」들었어요"|허가이 암살

허가이 죽음에 대한 소련파 간부들의 의구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노동신문 주필(후에 문화성부상)기석복, 최고검찰 소 부 소장 김택영, 문화성부상 정률 등 다혈질 간부들이 방마다 기석복의 집에 모여 허가이의 사인을 놓고 수군거리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나는 즉시 이들을 찾아가『너희들의 동향이 내무성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이들은 금방 말귀를 알아들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우리끼리라도 서로 정보를 교환해 알 것은 알고 있자』며 나에게 좋은 정보가 있으면 알려 달라는 주문을 했다.
나는 눈과 얼굴 표정으로 이들의 주문을 쾌히 받아들였다.
그후 기석복은 여러 차례 나를 찾아와 허가이의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없느냐고 졸라댔다.
글재주가 뛰어난 그는 소련파 인사 가운데 김일성 수상에게 신임을 받아 장래가 촉망되는 간부였다. 그렇지만 그는 신임은신임이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정의파이기도 했다. 나는 그가 찾아올 때마다 진전된 정보가 없어 그의 귀를 시원하게 해주지 못했다.
당시는 6·25전쟁 끝이어서 세상이전시체제로 경색될 대로 경색돼 허가이 죽음에 대한 문제는 일과성으로 묻혀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가이의 죽음에 대한 상세한 전말은 내가 소련으로 쫓겨난 후 다시 듣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59년 말 모진 사상검토 끝에 숙청 당한 후 간신히 평양을 탈출, 우즈베크 수도 타슈켄트로 갔다. 그곳에는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허가이의 맏딸 허마야가 찾아왔다.
해방 후 아버지를 따라 평양에 들어간 그녀는 소련출신 한인 2세인 인민군 장교(황씨)와 결혼, 함흥에서 살다 아버지가 죽자 남편과 함께 소련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아버지가 죽은 며칠 후 의붓 외조부모 가족이 먼저 평양을 떠나 현재 모스크바에 살고 있으며 뒤따라 의붓어머니가 친동생 3명을 데리고 나와 타슈켄트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가족들의 근황을 말하다 말고 나의 옷자락을 붙잡으면서 그만 참았던 울음을 쏟아 부었다.
우리 부부도 그녀를 붙들고 한참동안 울었다.
실컷 울고 난 그녀는 아버지가 죽기 전날 밤 외조부(최표덕 장군)와 체스를 두며 했던 말을 외조부로부터 소상하게 들었다며 그 내용을 털어놓았다.
『그날 밤 아버지는 자살할 정도의 정신상태는 전혀 아니었답니다. 가족에게 전할 유언이라고 생각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만약 자살할 눈치가 조금이라도 보였으면 외조부는 그날 밤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다만 아버지는 외조부에게「김일성 동지는 내가 자기의 일거 일동을 모스크바에 보고하고 있다고 오해해 나를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오해는 쉽게 풀릴 것이다. 지금 조국에는 37년 도(스탈린의 대숙청을 의미)를 생각케 하는 징조가 보이고 있다. 사실 우리는 김일성 동지를 너무 치켜세워 그를 조선의 스탈린으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가 적당한 시기를 선택해 고치지 않으면 인민들의 불행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께서도 알다시피 나는 여러 차례 나를 소환해 주도록 모스크바에 요청했다. 조국에서 나의 사명은 거의 끝났다. 오직 아첨분자들이 분별없이 날뛰고 있음이 걱정될 뿐이다」고 말했답니다.』
그녀는 잠시 숨을 돌린 후 말을 이었다.
『이 사실은 선생님 혼자만 알고 계시고 절대 입밖에 내시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 말을 전해 준 사람이 현재 인민군 고위장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저희들이 북한을 떠나오기 며칠 전 인민군 장교인 남편의 친구가 찾아와 자신의 친구(역시 인민군장교 )가 아버지 암살에 깊이 간여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는「허가이 알렉세이 이바노비치」(허가이의 소련이름)는 자살한 것이 아니고 비밀정치장교들에 의해 암살됐으니 가족들도 빨리 북조선을 떠나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고 권유하기도 했습니다.』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주위를 두리번거린 뒤 다시 말을 계속했다.
『저는 아버지의 비보를 듣고 중국 하얼빈에 피난 가 있던 계모 최니나(하얼빈의 소련중학교 교원출신)와 두 여동생 네라·지라, 남동생 게 오르기 등을 불러 아버지의 숙소를 찾아갔지요. 시체를 이미 치운 후였지만 일절 접근을 못하게 해 아버지의 유품하나도 챙기지 못한 채 되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후부터 보안대원이 우리가족을 감시했습니다.』
그녀를 만난 1년여 후인 61년 봄 나는 모스크바에 올라가 나처럼 북한에서 숙청 당한 후 망명한 친구들을 만나 숙청에 얽힌 비화들을 주고받았다.
남로당 출신 빨치산 양성소인 강동 정치학원장을 지낸 나의 친구 박병률이『최표덕이 모스크바에 온 후 친구들에게 허가이는 자살한 것이 아니고 암살됐다는 말을 하고 다녀 북한대사관에서 몹시 신경을 쓰고 있으니 입 조심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평양을 떠나오기 얼마 전 들은 허가이「암살」에 대한 단서가 될 비화 한가지를 털어놓았다.
그는『박정애가 당원들 앞에서「허가이는 왜 죽었느냐」는 질문을 받고「왜 죽었느냐 가 아니고 쓰러진 것 뿐」이라고 대답한 일도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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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