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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권 경선사/DJ가 YS에 대역전승/70년 신민당

◎분열과 통합의 발자취… 정치발전에 기여/56년 신익희­장면의 후보대결이 효시
민자당 대통령후보경선은 민주당에도 불길이 댕겨져 경선정국이 5월을 뒤덮고 있다.
국민·신정당도 이에 가세했으나 경쟁자가 없는 점이 다르고 민자·민주당경선은 후보간 지지세력의 현격한 차이때문에 들러리경선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집권당에서 대통령후보를 경선하는 것은 우리 헌정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어서 전당대회 이후의 민자당진로와 정계재편여부는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야권의 전유물이었던 대통령후보나 당권 경선은 그후의 정치판에 상당한 지각변동을 불러일으켰고 독재정권하에서 야당이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게한 원동력이 됐었다.
야당의 도전과 좌절,분열과 통합의 발자취인 대통령후보·당권 경선사는 오늘과 내일의 우리정치와 연결되고 있는 셈이다.
○…건국후 최초의 경선은 56년에 있는 민주당 정·부통령후보선출에서 비롯된다.
당시 민주당은 대통령후보 선정을 둘러싸고 해공 신익희선생을 지지하는 구파와 장면박사를 미는 신파로 나뉘어 치열한 대립을 보였고 부통령후보로는 조병옥박사와 김준연씨가 경합했다.
해공은 항일 기록이 있고 대중의 지지도가 높은데다 정치적으로도 장 박사에 비해 선배라는 것이 구파의 논리였다.
반면 신파측에선 전후복구를 위해 무엇보다 미국의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므로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선 미국통인 장 박사가 대통령후보가 되어야 한다고 맞섰다.
그후 몇차례의 절충끝에 신익희­장면 러닝메이트 방안이 합의됐으나 김준연씨가 뜻을 굽히지 않아 3월29일 전국대의원대회에서 표대결끝에 신­장 후보가 확정됐다. 신­장 티킷은 이승만대통령을 위협하는 회오리바람을 일으켰으나 선거일 10일전 신 후보의 급서로 정권교체를 못하고 말았다.
민주당의 신구파대립은 60년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59년 후보선출에서 더욱 치열해졌다. 후보선출 전당대회에서 앞서 두파는 대의원을 포섭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않아 분당론까지 제기될 지경이었다.
당내 분위기가 악화되자 59년 10월10일 구파의 보스인 조병옥박사가 후보지명 경쟁포기의 성명을 발표했으나 구파의 끈질긴 사퇴번의 압력에 굴복해 다시 후보경선에 나섰다.
이에 따라 같은해 11월26일 열린 민주당 지명대회에서 조병옥­장면이 표대결을 벌여 총투표자 9백66명중 4백84표를 얻은 조 박사가 대통령후보로,4백81표를 얻은 장 박사가 부통령후보로 각각 선출됐다(1명은 기권).
조 후보는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로 기세를 올렸으나 급격한 건강악화로 60년 1월29일 『낫는대로 곧 달려오리라』라는 짤막한 성명을 남기고 치료차 미국으로 떠났다.
이같은 와중에 자유당 정부는 5월 선거의 관례를 깨고 3월15일을 선거일로 공고하는 변칙을 구사,그후 집권당은 선거일 택일을 주요 집권 프리미엄으로 삼게됐다.
조 박사도 해공처럼 선거일 한달전에 운명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바라던 국민들을 안타깝게 했으나 야당의 경선을 통한 결집된 힘은 자유당 이기붕부통령후보의 당선을 위한 부정투표를 낳게됐다.
○…그 결과 4·19가 일어나 자유당정권이 붕괴되고 내각제 개헌으로 민주당이 60년 여름 집권했다. 그러나 7·29총선 직후부터 신·구파는 내각책임제하의 국무총리직을 놓고 사활적 대립을 벌였다. 구파는 대통령과 국무총리자리를 자파에서 차지하기 위해 8월4일 중진들로 구성된 20인위의 결의에 따라 신파와의 결별을 선언하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에 반해 신파는 대통령에 구파인 윤보선을,국무총리엔 자파의 장면으로 자리안배방안을 제시했으나 구파는 대통령 윤보선,국무총리 김도연의 독식안으로 맞섰다.
마침내 8월12일 민·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윤보선후보가 재적의원(2백63명) 3분의 2가 넘는 2백8표를 얻어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5일후인 8월17일 실시된 김도연국무총리는 인준투표는 재석 2백24명중 찬성 1백11·반대 1백12·무효 1표로 부결됐다.
다음날 윤 대통령은 2차로 국무총리에 장면을 지명,국회에 동의를 요청했고 19일의 표결에서 재석 2백25명중 찬성 1백17·반대 1백7·무효 1표로 인준을 받았다.
이때 장 박사측은 상당한 자금과 자리약속을 하는 「당근 전략」으로 중도파 및 구파를 회유·포섭하는 좋지않은 선례를 남겼다는 평도 듣고 있다.
그러나 분당으로 인한 약체정부 수립은 끝없는 정정만 했을 뿐 분출하는 각계의 제몫찾기 요구에는 속수무책의 대응으로 일관해 정권의 수명을 단축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우리 정당사에 가장 치열하고 숨막히는 경선의 장을 연 것은 70년의 신민당후보 경선이었다.
69년 11월8일 김영삼원내총무가 「40대 기수론」을 제창하며 대통령후보 지명전에 나서겠다고 선언하자 김대중·이철승씨가 잇따라 가세해 정통야당의 장로정치를 단숨에 무너뜨리고 세대교체의 돌풍을 일으켰다.
김영삼·김대중·이철승씨 등 40대 기수론자들은 3선 개헌후 현실안주를 택한 유진산당수 체제에 대해 현실타파를 위한 명분으로 세대교체론을 들고 나왔기 때문에 국민적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
세대교체론자들은 구상유취하다고 버티던 유 총재도 70년 9월 결국 후보지명권행사 보장을 조건으로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김대중씨는 지명권행사를 거부,독자출마했고 김영삼·이철승씨는 이를 수락했다.
유 총재는 후보지명대회 하루전 중앙상무위원회에서 김영삼씨를 추천함으로써 두 김씨의 대결로 압축됐다.
당시 객관적 전력상 김영삼씨의 승리가 예견됐다. 그래서 김영삼씨는 대회전날 후보수락연설문을 준비하는 방심을 보였고,김대중씨는 철야로 대의원 숙소를 돌며 대의원 포섭에 사력을 다했다.
9월29일의 1차 투표에서 재석대의원 8백85명중 김영삼 4백21표,김대중 3백82표,무효 82표로 나타나 두 사람 모두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 이에 이철승당수안을 제시한 김대중씨의 기민한 전략으로 이씨가 2차 투표에서 김대중후보를 밀어 김대중 4백58표,김영삼 4백10표,무효 16표로 김대중후보의 대역전극이 연출됐다.
당시 경선에서 두 김씨,특히 김대중씨가 참신하고 기발한 정책대안을 다수 제시해 강한 인상을 남겼던 점은 특기할만하다.
○…야당의 당권 경선사례로는 74년과 79년의 신민당 전당대회를 꼽지 않을 수 없다.
74년 4월 유진산씨가 별세하지 신민당의 당권경쟁이 불을 뿜었다.
김영삼·이철승·정해영·고흥문씨 등이 대의원의 지지를 얻기위해 지방순회에 나섰고 이들은 유진산씨의 「비선명성」을 규탄하면서도 당내 최대계보였던 유진산계의 표 흡수작전을 아울러 전개했다.
이에 맞서 유진산계 잔류세력들은 김의택씨를 밀어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확보하려 했다.
소수파였던 김영삼씨는 이때 김동영·최형우의원 등 소장파 4명으로 전국대의원 훑기 두더지작전을 전개했다. 이로부터 「좌동영,우형우」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다.
8월22의 1차 투표결과 김영삼 1백97,김의택 1백42,정해영 1백26,고흥문 1백11,이철승 1백7표로 나타났다.
1차 투표후 고흥문은 김영삼지지를 선언하고 물러섰으며 이철승씨는 김의택쪽에 표를 몰아주기위해 후보를 사퇴했다.
3자가 대결한 2차 투표는 총투표 7백23명중 김영삼 3백24,김의택 2백3,정해영 1백85,무효 11로 김영삼씨가 차점자인 김의택씨와의 표차를 1차의 55표에서 1백21표로 넓혔다. 그러나 과반수 획득에는 실패했는데 김의택씨의 사퇴로 김영삼 야당시대가 막을 올렸다.
그렇지만 김영삼총재는 각목대회라 불렸던 76년 전당대회에서 유신체제의 정치공작개입과 반김영삼진영의 연합전선 구축에 따라 당권을 이철승대표최고위원체제로 넘겨주는 분루를 삼켜야했다.
신민당내 반유신의 김영삼진영과 유신체제안주의 당권파는 79년 「5·30전당대회」에서 피나는 재격돌의 2차투표끝에 이기택씨의 지지를 이끌어낸 김영삼씨를 총재로 부활시켜 유신시대를 마감하는 전단을열었다.
야당경선자는 ▲반독재의 역사의식 ▲선명성시비의 노선대결 ▲패자의 승복과 승자의 포용이라는 정신이 관류해 정치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해왔다.
92년 전개되는 민자·민주당의 경선이 정치발전에 어떤 이정표를 찍을지 각각의 후보와 그 진영은 심사숙고해야할 것이다.<신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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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