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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한·중·일 관계사 재조명|의병-수군"결사항쟁"승전주역

<전황(2)>

흔히 우리의 참패로 인식돼온 임진왜란에서 실제로 왜군이 승승장구한 기간은 전체전쟁기간 7년 중 불과 2개월에 불과했다.

곽재우 등 지방 유생 지휘…한때 10만 육박 의병|화포·군선 서 우위…호남방어 결정적 기여 수군|행주대첩 고비…정주재난 겪으며 7년 전쟁 막 내려

왜군은 개전 직후 2개월간 북상을 거듭했으나 이후부터는 공방전에서 밀려 후퇴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큰 희생을 내고 물러가게 된다. 결국 임진왜란은 전장이 한반도였기에 우리민족의 수난이 가장 컸지만 전쟁자체는 오히려 우리가 이겼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임란의 전세역전은 여러 요인으로 가능했지만 전국각지에서 의분, 봉기한 의병의 활약이 단연 수훈갑이다. 의병은 왜군의 침략을 받은 경상도에서 시작, 전국으로 확산됐다. 의병을 지휘한 인물은 지방의 유생이나 전직관료였으며 관군을 잃은 현역관리도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의병은 관군과는 비할 바가 아니어서 죽음을 무릅쓰고 곧장 달려들며 조금도 꺾이지 않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와 칼날을 도무지 당할 수 없었다.』

당시 왜군들이 저희들끼리 나누었다는 대화기록이다. 사실 의병의 전력은 뛰어난 전쟁기술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결사항쟁의 정신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초전에서 패배를 거듭하며 도망치기에 바빴던 관군과 전혀 다른 의병의 이 같은 용맹이 이미 왜군의 사기를 꺾었음을 알 수 있다.

『홍군과 백군은 피하라.』이는 당시 왜군부대의 수칙이었다. 홍군과 백군은 왜병이 가장 두려워한 의병부대였다.

<「홍군」경계의 대상>

홍군은 다름 아닌 경상도 의령에서 분기한 홍의 장군 곽재우부대다. 부유한 유생이었던 곽 의병장은 왜적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산을 털어 의병을 조직했다. 지역유지였던 유생들을 규합하고 그들의 노비와 양식을 모았으며, 관군이 버리고 간 무기를 수습해 무장했다.

점차 산간으로 피난 갔던 백성들도 모여들어 2천 병력을 휘하에 거느리게 됐다.

홍군은 쉽게 말해 신출귀몰하는 게릴라전에 능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홍의 장군이라고 불렸던 곽 의병장은 자신 외에 부하 몇 명에게도 붉은 옷을 입게 해 여기저기서 홍의 장군이 출몰한다는 심리전을 구사했으며, 강 가운데 나무말뚝을 박아두고 왜군배가 말뚝에 걸려면 습격하는 등의 전술을 구사했다.

백군은 충주에서 분기한 조웅의 부대였다. 조웅 부대는 깃발을 모두 흰색으로 만들어 백기부대라고 불렸다. 조웅은 왜적의 총탄에 쓰러져 잡힌 뒤 사지를 잘리는 고통 속에서도 왜장을 꾸짖은 절개와 충용으로 유명하다.

왜란 중 일어난 의병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의병이 이미 해체되기 시작한 1593년 정월 명나라기록에 2만2천6백명으로 나타난 것으로 미루어 의병활동이 왕성했던 임진년7, 8월에는 10만명이 훨씬 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같이 왜적에 대항해 분기한 의병이지만 명분은 다소 달랐다. 왜적의 침탈을 받은 경상도의 의병은 무엇보다 「스스로 우리마을을 지킨다」(자보향리)는 슬로건을 앞세웠다.

반면 왜군의 직접침략을 받지 않은 호남지방 등의 의병은「왜군에 쫓기는 임금을 보위하자」는 근왕의병의 성격이 강했다.

향토방어를 외치고 봉기한 경상도의병은 유격전으로 왜병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왜군의 북진을 막았다. 왜군이「3백명 이상 모이지 않으면 마음대로 이동 수 없다」는 수칙을 만들어야했던 것도 당시의 왕성했던 의병활동을 반영해주는 사실이다.

반면 호남 등의 의병은 지역방어와 함께 임금을 호의하기 위해 북행을 시도한다. 나주의 김천일 부대는 한양수복을 위해 최초로 경기지역에 진출한 부대며, 6천대군의 고경명 부대는 북상하다가 전라도로 침입하려는 왜군부대를 맞아 금산성 전투를 벌임으로써 호남의 곡창을 지켰다.

특히 고경명 등 의병지도자들이 관군장수들의 도망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금산성에 남아 장렬한 최후를 마친 사실은 이후 전국적인 의병봉기를 촉발한 계기로 주목된다.

의병활동은 또 민심을 안정시키고 관군이 재정비되어 반격을 시작할 수 있는 뒷받침이 됨으로써 전세역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임란을 승리로 이끈 또 다른 저력은 수군의 제해권 장악이었다. 이순신으로 대표되는 수군은 왜군의 서해진출을 막아 호남지역방어에 결정적 기여를 했으며, 전쟁 중 호남곡창의 양곡이 관군과 명원군의 군량으로 조달될 수 있게 했다. 수군의 활약으로 왜군은 수륙연합작전을 필수 없게돼 당초 작전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으며, 왜군의 선봉 고니시(소서항외)부대가 평양을 점령한 후 침략의 발길이 묶일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수군의 결정적인 공이다.

수군의 연전연승은 일본을 앞선 우리 과학기술의 힘이었다. 특히 뛰어난 조선술로 건조된 견고한 전선과 왜군이 갖지 못한 화포의 위력은 일본수군을 제압하기에 충분했다.

이 같은 의병과 수군의 맹활약으로 초전에 무력하게 패퇴했던 관군도 차차 재 정비돼 간다. 따라서 의병이 해체되어 관군에 편입되어갔으며, 전투의 주도권도 관군으로 넘어간다.

<주도권 관군으로>

10월에 있었던 진주성 싸움은 관군이 주도한 대첩으로 주목된다. 진주목사 김시민 등은 사흘 밤낮에 걸쳐 사투를 벌인 결과 경상도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관문인 진주성을 방어함으로써 왜군의 호남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 같은 우리의 노력에 더해진 명군의 지원은 전선을 남하시키는 주력이었다. 명나라는 우리의 원군요청에 처음에는「왜군과 결탁한 모의」라는 의심을 갖기도 했지만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7월 1차로 5천명의 병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이들은 고니시부대와의 전투에서 대패해버린다.

이후 명은 패군과의 강화를 서두른다. 명으로서는 2차 원병을 파견할 시간이 필요했으며, 왜군으로서도 자신들의 수군이 서해로 진출해 합세 할 여유가 필요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해 12월 명의 4만 대군이 이여송의 지휘하에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다. 이듬해인 1593년1월 명원군은 우리의 관군·의병 승려군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했다. 평양성에서 패배한 고니시부대 만이 아니라 가토와 구로다부대 등 왜군은 일시에 서울을 향해 패주했다. 명군은 방심한 채 추적을 계속하다 서울 북쪽인 고양의 벽제관에서 매복해있던 왜군정예부대의 기습을 받아 대패한다. 호위병만 데리고 뛰어들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여송은 우리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개성으로 철군했다가 다시 군량부족을 핑계로 평양까지 물러선다.

서울로 모여든 왜군이 벽제관 전투의 여세를 몰아 들이닥친 곳이 행주산성이었다. 당시 행주산성에는 전라감사 권율이 명군의 승전소식을 듣고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북진해 머무르고 있었다.

왜군은 3만의 대병력을 동원해 총공세에 나섰으나 권율 등 2천3백여명이 새벽부터 밤까지 아홉 차례에 걸친 왜군의 대공세를 막아내며 기적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김시민의 진주대첩,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함께 임란3대첩으로 기록되는 행주대첩이다.

벽제관의 승리감에 취했다가 곧 이은 행주대첩에서 사기를 잃게된 패군은 명의 계속된 강화요청을 받아들여 4월18일 서울에서 철수, 남해안일대(서생포에서 웅천사이)에 구축한 왜성에 들어앉아 강화회담의 결과를 기다린다. 그렇지만 와중에서도 왜군은 인근지역에 대한 침탈을 쉬지 않는다.

대표적인 만행이 진주성에대한 2차 공세다. 김시민 목사 등이 분전했던 진주대첩을 설욕하려는 듯 왜군은 일본에 있던 도요토미의 직접 지시에 따라 대규모 보복전을 감행했다. 7만여 왜병대군은 6월22일부터 공격을 시작, 8일에 걸친 공세 끝에 진주성을 점령한 뒤『진주성을 철저히 유린하라』는 도요토미의 지시에 따라 6만여 주민을 학살했다. 이 밖에도 왜성에 주둔하면서 수시로 무고한 우리 백성을 끌고 가 포르투갈 노예상인에게 팔아 넘긴 행위는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만행보다 심각한 침략행위였다.

명 사신이 일본까지 들어가는 강화회담이 몇 년 간 계속됐지만 엄청난 시각 차로 성과가 있을 리 없었다. 명은 일본을 속국의 하나로 생각하고『도요토미를 일본 왕으로 인정해 줄 테니 싸움을 그만두라는 식이었다. 반대로 일본은「중국과 대등한 입장」이라는 생각에서 명 황실과 일본황실의 혼인을 요구하고 조선을 지배하겠다』는 오만으로 조선4도의 이양과 왕자·신하의 인질을 요구했다. 당연히 도요토미는 일본 왕이 되는 것을 허락한다』는 명사신의 전갈을 물리친 뒤 곧장 재 침략을 명령한다.

<수길 죽은 후 철수>

1597년 1월 시작된 일본의 재 침략(정유재난)은 고니시와가토를 선봉으로 한 14만 대군이라는 점에서 임란과 비슷했지만 전략은 달랐다. 남해안의 액성을 중심으로 호남지역을 먼저 점령한 뒤 북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5년 전과 달리 조선도 군비를 정비해둔 상태였으며 명군 역시 적극적으로 개입. 공세를 취한다. 조·명 연합군은 세 갈래 육로로 왜군주둔지인 순천·진주·울산을 공격했으며, 수군은 남해안 일대를 장악했다. 결국 같은 해 11월 왜군은 도요토미의 사망과 함께 철수하게된다. 이로써 7년간의 전쟁은 끝나고 동양의3국은 각각 전후처리를 둘러싼 내부진통을 겪게된다. <이장희 교수<성균관대·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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