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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위세력손잡고 사회주의로통일”(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8)

◎박헌영의 정치노선:하/소의 「찬탁」지지에 겉으로만 따르는 척/남쪽 정세 불리하자 김일성 지지 선회
해방후 서울주재 소련영사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박헌영은 남북의 「당중앙」위치를 고수했었다.
그러나 해방 한달여후 입북한 김일성이 북한주둔 소련군에 의해 「항일투쟁 민족영웅 김일성 장군」으로 등장하자 그의 당중앙 위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로 급부상한 이후부터 박헌영은 북한지역에서 사실상 당의 실권을 상실했다.
특히 그는 45년 12월말 신탁통치문제와 46년 2월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설치등 붉은 군대에 의해 짜여진 정치일정에 맞추느라 자신의 노선을 수정해야 하는등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이같은 진통속에서도 소련의 서울주재 총영사관은 박헌영의 절대적인 후원자로 그를 스탈린에게 북한의 지도자로 추천했다. 주서울 소련총영사관부영사 샤브신의 부인 쿨리코아 박사(87)는 당시 박헌영의 성격과 정치노선 등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박헌영이 속으로는 김일성과 경쟁의식을 갖고 있었겠지요. 그러나 겉으로는 그것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평가할때 단점보다는 장점을 부각시켰습니다. 심지어 자신과 노선이 다른 이승만을 평가할때도 그의 애국애족정신과 정치능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는 여운형과 함께 여러차례 미군정 지도자들을 만났으며 그때마다 미국은 왜 이승만만 지지하느냐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훗날 북한정권은 그의 이런 행적 등을 구실삼아 「미제간첩」이란 죄명으로 그를 사형에 처하지만 그것은 매우 우스운 일입니다.』
○간첩 아닌 혁명가
쿨리코아 박사는 『그는 이론이 준비된 사회주의 혁명가였지 결코 미국간첩은 아니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샤브신은 해방초기부터 박헌영이 월북한 46년 10월까지 14개월동안 서울에서 매일 한두차례씩 의무적으로 만났습니다.
이 기간중 샤브신은 수차례 박헌영을 비밀리에 평양에 보내 소군정과 김일성 진영과의 비밀 회동을 갖게 했고 박의 서울집회 등에도 반드시 참석,후견인의 역할을 했지요.
샤브신은 미군정 등의 눈길을 피해 공원 등지에서 만나 자신의 승용차 뒷좌석에 박헌영을 태운뒤 모포로 씌워 영사관밀실로 데리고가 밀담을 했습니다.
이들이 주로 논의했던 사항들은 김구·이승만등 우익진영과 미군정의 동향,공산당의 활동방향,그리고 모스크바 중앙당의 지시전달 등이었습니다.』
쿨리코아 박사는 샤브신과 박헌영의 밀담내용 모두를 영사관 도서관장인 자신이 정리하고 타이핑해 모스크바중앙당 등에 보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박헌영이 평양에 온후 자신들이 평양을 떠난 47년까지 그와의 교분이 지속됐으며 모스크바(소련외무성)에 가서도 박헌영이 숙청되기 직전까지 원거리 교분이 유지됐었다고 밝혔다.
쿨리코아 박사의 회고.
『해방후 우리와 만난 박헌영은 자신의 정치노선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는 「조선은 부르좌 민주혁명후 사회주의혁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소련과 미국이 조선을 해방시킨 동맹국이라고 결론지으며 중립세력과 연합해 조선을 사회주의국가형태로 통일시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정치노선을 갖고 있던 그는 신탁통치문제가 대두되자 많은 갈등과 고민에 빠졌습니다. 처음 며칠동안 박헌영진영에서조차 반응이 나오지 않더군요. 샤브신이 그를 불러 물어보니 그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은 조선의 정세와 민족문제 등을 바로 보지 못한 것」이라며 반대했습니다. 소련영사관측이 「소련의 지시니 찬탁애 앞장 서달라」고 요구하자 겉으로는 따르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반탁을 고수했습니다. 이같은 그의 동향이 평양사령부에 알려졌고 치스차코프 대장과 레베데프 소장 등은 46년 1월 초순 그를 평양으로 불러 「소련의 정책이니 찬탁을 따르라」며 명령식 설득을 했지요. 소련군지도부의 설득을 당하고 서울에 내려온 뒤에는 찬탁으로 급선회했으나 여전히 속으로는 반탁을 떨치지 않았으며 서울의 공산당 내부에서도 찬·반탁을 놓고 의견충돌이 많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평양의 소련군 최고지도부로부터 신임을 잃었을 겁니다.』
쿨리코아 박사는 『그러나 박헌영은 자신의 정친노선에 따랐으며 자신을 신임했던 소정보기관 소속 평양주둔 소련군사령부의 정치고문 발라사노프·샤브신 부영사 등에게 단 한번도 자신을 최고지도자로 천거해 달라는 등 신상발언을 하지 않았었다』고 회고했다.
○박논설집 첫 공개
북한에서 외무서부상 등을 지냈던 박길용 박사(74·소과학아카데미동방학연구소선임연구위원)는 박헌영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는 증거로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희귀자료(1946년 8월15일 서울의 마르크스·엥겔스·레닌연구소편집 우리문화사발행 박헌영의 「조선인민에게 드림」이란 논설집)를 제시했다.
이 논설집 1백96쪽에는 박헌영이 UP통신(현 UPI의 전신의호이트기자와 서면 인터뷰(1946년 3월26일·서울)에서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조직되는 때에 대통령으로 김일성씨를 지지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김일성씨는 전시에 항일빨찌산 지도자로 민족영웅이다. 그는 북조선 인민들이 지지할뿐만 아니라 남조선인민들도 그를 민족영웅으로 여긴다. 북조선 여러당에서 그를 대통령으로 내세우는 때에는 남조선인민들도 그것을 지지할 것이다. 우리당에서는 인민과 함께 지지한다」고 쓰여있다.
이에 대한 박박사의 증언.
『소군정 지도부와 김일성 진영에서 박헌영의 이같은 발언을 보고 대단히 놀랐습니다. 박헌영이 미국기자와 인터뷰를 할 당시는 김일성이 양손에 당과 행정부를 쥐고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의 위상은 어디까지나 북한주둔 소련군에 의한 것이지 스탈린의 최종 지명이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지요. 변수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시기였으며 박헌영도 이를 알고 있었다고 봅니다.』
레베데프 정치사령관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평양주둔 소련군사령부에는 모스크바 중앙당으로부터 스탈린에게 올릴 최고지도자후보를 추천하라는 지시가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주서울총영사관도 같은 지시를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군부에서는 김일성을,정보기관소속 평양주재 정치고문 발라사노프와 서울영사관의 샤브신등 소련외무성과 정보기관쪽에서는 박헌영을 추천했다.
○“김은 조선지도자”
박헌영도 이같은 분위기를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그가 스스로를 낮추고 김일성을 「민족영웅」으로 추대한 정치적 발언을 한 것은 소군지도부와 김일성 진영을 놀라게 할 만하다. 박길용씨는 『만약 박의 이같은 인터뷰내용이 사실이라면 그는 김일성과 소군부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면서 자신이 살아 남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발언으로 보아야 한다』고 해석했다.
아니면 이미 공산당이 미군정에 의해 와해되는 과정에 있었던 남조선의 당시 상황에서 박헌영으로서는 다른 발언을 할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해 7월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부르고 김을 북한의 지도자로 지명한다(레베데프 소장의 증언,본보 91년 11월30일자 참조).
전후 소련군부의 영향력이 큰 시기에 소련군정의 뒷받침을 받은 김일성은 미군정하의 남조선을 활동근거지로 삼고 있는 박헌영에 비해 유리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또 박헌영의 비운이기도 했다.
□특별취재반
○북한부
김국후 차장
안희창 기자
유영구 기자
안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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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