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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의 정치노선:상(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7)

◎“해방직후 공산당재건 소와 합의”/8월18일 상경… 소 영사관과 극비접촉/광주서 지하활동 때부터 메시지 오가/증언자 고광표씨 쿨리코아씨

□특별취재반

북한부

김국후 차장

안희창 기자

유영구 기자

안성규 기자

박헌영의 월북으로 그의 서울시대는 끝난다. 박헌영은 남로당을 이끌며 남조선 혁명전략을 추진하지만 북한에선 김일성아래 부수상겸 외무상이었다.

수년후 「미제간첩」이란 너울을 쓰고 처형된 그에겐 여러가지 평가가 엇갈리고 있지만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박헌영에 대한 소련의 평가였다. 소련군정은 김일성을 소비예트화된 북조선의 지도자로 선택했으나 서울에 있던 소련영사관은 박헌영에게 강한 집착을 보였고 스탈린에게 그를 조선공산당을 지도하는 최고지도자 후보로 추천했다. 그의 혁명활동의 비밀 후원자였던 당시 서울주재 소련영사관의 부영사 샤브신(사망)의 부인이자 소련영사관 도서관장이었던 샤브신 쿨리코아여사(87·정치학박사·전 소련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선임연구위원)와 북한에서 외무성 부상등을 지냈던 박길용 박사(74·소련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선임연구위원)등은 박헌영을 또다른 각도에서 설명해준다.

대부분의 역사는 박헌영이 8·15 해방직후 서울에 나타난 것은 장안파 공산당이 이미 창당을 끝낸 1945년 8월18일 또는 19일로 기록하고 있다.

1939년 형무소에서 만기출옥한 박헌영은 권오직·이관술·이순금(여)·장순명·이현상·김삼룡 등이 조직한 경성콤그룹 책임자로 추대되어 공산당 재건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일제의 심한 탄압으로 41년 광주시 월산동(현재는 서구 백운동)에 있는 한 벽돌공장의 노동자로 위장취업,지하에서 숨어있다 해방을 맞아 상경한 것이다.

해방후 그가 서울에 언제 나타났으며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는가는 해방 하루만에 창당을 선언한 장안파 공산당의 정통성문제와 관련,매우 중요한 문제로 학계의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그가 해방 3∼4일뒤인 8월18일 또는 19일 상경해 불과 하루 이틀만에 한반도와 국제정치 상황분석,정치노선 등을 규정하는 장문의 「8월테제」를 작성해 20일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를 발족시키면서 이를 발표,자신이 추진하는 공산당만이 「정통공산당」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헌영은 역사속에서 자신이 사전에 서울 주재 소련영사관 대표를 만나 조선공산당을 재건키로 합의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아 조선공산당의 정통성 문제가 명확히 설명되지 않았었다. 이에 대해 쿨리코아박사는 47년만에 처음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당시 조선의 수도 서울에서 소련을 대표하는 곳은 소련영사관이었습니다. 소련영사관(남편 샤브신 부영사를 지칭)이 박헌영을 처음 만난 것은 해방 2∼3일후인 어느날 오후였습니다. 박헌영이 영사관(현 정동)에 나타나 샤브신(소 정보기관 소속으로 당과 정치문제담당)을 찾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서울에 가기전 그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고 만나기 직전까지 일본당국의 눈을 피해 제3자를 통해 광주에 있던 그에게 비밀메시지도 보냈습니다.

이날밤 늦게까지 영사관에서 해방후 서울의 정세와 조선공산당 재건문제를 심도있게 협의했습니다.

우리는 1931년 그가 모스크바 동방노동자 공산대학에 유학할때 소련당중앙에서 그에게 조선공산당 재건명령이 하달되었던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지요. 박헌영은 샤브신에게 당재건문제는 자기에게 맡겨달라고 요청했고 샤브신은 그의 세차례 10여년동안의 감옥생활등 화려한 투쟁경력과 뛰어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등을 높이 평가해 적극 지원하기로 약속했지요. 이후 샤브신은 영사관부근 공원(덕수궁으로 추정됨)에서 매일 한두차례씩 그를 만나 공산당과 민족통일문제,서울의 정세분석 및 공산당의 활동방향 등을 상의했으며 모스크바 중앙당의 지침 등을 시달하기도 했습니다.』

쿨리코아 박사의 이같은 증언은 해방후 박헌영이 이끌었던 조선공산당 또는 남로당의 정통성문제를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면 해방후 박헌영은 광주에서 언제 어떤 방법으로 상경했는가.

이에 대해 광주지역 실업계의 원로 고광표씨(85·광주시 방림동 167)는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해방 이틀후인 1945년 8월17일 오전 광주극장에서 건국준비 전남지부가 결성됐습니다. 이 자리에서 선출된 각계대표 33명중 지주대표인 나를 비롯,5명의 대표단을 해방정국을 살피기 위해 이날 서울에 파견키로 결정했지요. 대표단은 해방과 더불어 열차의 정상운행이 중단돼 불가피하게 목탄트럭을 타고 상경했습니다. 대표단을 실은 트럭에는 까무잡잡한 얼굴에 흰 무명 한복차림에 고무신을 신은 40대 중반의 한 사나이가 적재함 귀퉁이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 사나이는 대표단중 한사람인 고항씨(작고·은행원)의 소개로 이 트럭에 동승했습니다. 대표단 일행은 이날밤 전남 장성 네거리부근에서 하룻밤을 자고 18일 전주에 도착했지요. 대표단이 아침밥을 먹는사이 이 사나이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지만 줄무늬가 있는 감색 양복으로 갈아입고 새 구두를 신고 있더군요. 잠시후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나왔다는 무기수 한사람(김삼룡)을 대표단에 소개했습니다. 이 사나이도 트럭에 동승한 겁니다. 목탄차가 이날 석양무렵 지금의 남대문 지하도 입구의 그랜드호텔앞에 이르자 두 사나이는 차를 멈추게 해 대표단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어디론가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대표단은 이들이 자취를 감춘뒤에야 이들이 박헌영과 김삼룡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며칠후 광주에 돌아와 좌익계열 인사들로부터 박헌영이 이득표(작고)이 경영하는 광주시 월산동의 벽돌공장에서 「김성삼」 또는 「김추삼」이란 가명으로 직공행세를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고씨의 증언은 「소련영사관측이 해방2∼3일후 박헌영을 처음 만났다」는 쿨리코아박사의 증언과 거의 일치한다.

쿨리코아박사는 『한국의 일부 역사가들은 해방후 박헌영이 불과 며칠사이에 장문의 「8월테제」를 작성할 수 있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나 박헌영은 광주에서 지하활동을 하면서도 이순금(김삼룡의 부인) 등 경성콤그룹 인사들과 계속 지하접촉을 하면서 정세파악을 하고 있었으며 상경하던날밤 샤브신 부영사과 한반도의 정세분석 및 장래문제에 대해 깊은 논의를 했기 때문에 그의 평소 이론준비와 논리적 사고등을 감안할때 하루정도면 작성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쿨리코아 박사의 회고는 계속된다.

『소련 영사관측은 박헌영이 모스크바 유학시절 부인 주세죽과 비극적인 결별을 하고 서울에 돌아와 혼자 외롭게 살며 혁명사업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생활은 물론 신상문제에 대해서는 한번도 언급하지 않은 과묵한 성격이었지요. 오직 혁명사업에만 몰두했던 철저한 공산주의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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