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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보다 진한 우정…자식이 되찾았다|진도 김영원 회장-미하일강|두 집안의 우정과 분단44년

44년만의 해후였다.
해방되던 45년 평양에서의 선록이 서울과 모스크바를 잇는 보은으로 다시 이어졌다.
남-북 분단과 한-소 냉전이 두 가족의 정을 갈라놓은 지 44년. 이제 그 세월은 메워지게 됐다.
모피업체로 널리 알려진 진도 김영원 회장의 서울 성북동 집. 요즘 그 집에는 모스크바에서 온 루드밀라 알렉세예브나 이씨(71)와 이씨의 큰아들 발레리 미하일로비치 강씨(49·소련 전자연구소 부 소장)가 묵고 있다.
이씨는 중앙일보 연재물「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등장하는 미 하일 강 소좌의 부인이다. 강 소좌는 평양 소 군정의 정치담당 보좌관으로 김일성 정권창출의 한 주역이었다.
두 가족은 이 땅의 식민과 분단의 늪을 빠져 나와 휴머니즘의 꽃을 피워 냈다.
지난4월 김 회장은 모스크바로 날아가 애타게 찾던 이씨와 극적으로 상봉했다. 그 자리에서 이씨로부터 건네 받은 작은 상자와 두루 마리 그림을 풀어 본 김 회장은 한동안 숨이 막혀 왔다.
종이 곽에는 낡은 회중시계가 들어 있었고 낙엽처럼 색이 바랜 두루 마리는 호랑이 그림이었다.
해방당시 13세 소년이었던 김 회장의 눈에도 선한 그것들은 아버지 김성식씨(해방 때 41세·81년 작고)물건이었다.
김씨는 47년 월남할 때 그것을 재봉틀·금반지2개와 함께 이별의 정표로 강 소좌네에게 주었었다.
『이걸 어떻게 아직까지 보관하셨습니까.』
『소중한 선물인데 어찌 함부로 할 수 있었겠소. 주인(미하일 강 소좌)도 돌아가실 때까지 이 시계를 지니고 다녔소. 그림도 10년 전 까진 벽에 걸었었는데 더 낡아질까 봐 뒤에 덧 종이를 대고 장롱 속에다 보관했소.』
『내가 이걸 간수하기보다는 어른(김성식)의 유품으로 후손들이 보관하는 게 좋지 않겠소.』
그러면서 이씨는 시계의 금줄과 금반지 1개는 70년께 생활이 어려워 팔아 썼다며 미안해 했다.
두 가족의 인연은 45년 평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자동차분전학원과 정비업소를 운영하던 김성식씨는 평원 군 일대 70만여 평의 논밭을 소유한 지주이기도 했다.
대동강이 굽어보이는 시내 경상 리에 자리한 김씨의 집은 수세식화장실까지 갖춘, 그때로서는 보기 힘든 2층 양옥이었다.
공산당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듣고 있어 불안한 마음이었기만 김씨는 다만 해방된 기쁨만으로 진주하는 소련군을 맞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김씨의 친구 한 명이 『소련군중에는 한국인도 여러 사람 있는데 그들을 식사에 초대해 앞일을 들어보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김씨와 강 소좌는 첫 대면을 했다. 두 사람이 왜 첫눈에 서로 끌렸는지는 알 길이 없다. 김 회장 어머니는 그날 두 사람이 밤늦도록 가족이나 조국을 화제로 삼아 이야기를 나눴다고 기억한다.
강 소좌는 그날이후 틈틈이 김씨 집에 들러 식사도 하고 저녁이면 장기도 두다 갔다.
당시 소 군정은 지주계급처단을 제일의 사업으로 했다. 김씨는 강 소좌가『김 선생은 지주이긴 하나 알아보니 일가친척들과 논밭을 일궈 부자가 된, 자수성가한 사람이고 덕망 있는 유지라 달리 취급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며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그러나 두 사람이 사귄 지 한 달쯤 후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김씨가 지주라는 이유로 최용건이 지휘하는 대동경찰서(치안대 평양본부)에 연행된 것이다.
시베리아로 갈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강 소좌가 달려왔다.
『풀어 주시오.』
『이건 혁명사업이오.』최용건이 따졌다.
『이 사람은 다르오. 악질이 아니오. 내가 조사를 끝냈소. 풀어 주시오.』
강 소좌는 김일성에게도 전화를 넣었다.
그러고도 몇 번의 옥신각신 끝에 김씨는 풀려났다.
그러나 그 뒤로도 김씨는 툭하면 경찰에 불려 갔고 그때마다 강 소좌가 빼내 줬다.
『김 선생이 자꾸 잡혀가는데 내가 지켜 있을 수도 없고, 가만있어 봅시다.』
강 소좌가 무릎을 쳤다.
『내 동료 중에 이노겐치 김과 남 군이 있는데 힘이 세요.(두 사람은 당시 소련정보기관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이 사람들에게 2층 방을 쓰게 합시다. 그러면 건드리지 않을 거요.』
『지금 2층에 있는 소군 대위가족은 어떻게 합니까.』
『다 방법이 있지요.』
강 소좌는 즉시 김씨 집으로 가『당신, 집세를 내고 이 집을 쓰나. 이것 민폐 아닌가. 당장 안 나가면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고 호통을 쳐 내쫓았다.
그후 네 사람은 친구이상으로 지냈다. 루드밀라 이씨는 그해 말 장남 첫돌엔 김일성도 함께 초청해 흥겹게 놀았다고 기억했다.
그럼에도 돌아가는 상황은 김씨를 암담하게만 했다. 다음해 생각 끝에 김씨는 몇 달 전 남하한 동생 형식씨 집에 큰딸은 내려보냈다.
강 소좌 등은 서울에서 열리는 미-소 공위 참석차 상경할 때에는 딸에게 보낼 김씨 물건도 챙겨 줬다고 한다.
그러나 강 소좌 등의 도움은 어차피 오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따금 엄습하는 위기감도 견딜 수 없었다. 47년 김씨는 남하를 결심했다.
그때 강 소좌가 찾아왔다. 『김 선생, 나는 하바로프스크로 떠납니다. 당의 명령이 났어요. 심상치 않습니다. 내려가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김씨는 정표로 자신이 가장 아끼던 회중시계와 앞으로 액운을 부디 피하라는 뜻으로 호랑이 그림을 선사했다.
두 사람은 그 뒤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빈손으로 월남한 김씨는 가업과도 같은 자동차정비업을 서울 용 산에서 다시 일으켜 번창시켰다.
생전에 김씨는 아들 영원·영철씨(진도부회장)등에게 강 소좌의 고마움을 되새겨 줬으며 그를 만나 보고 싶다고 했고 이 말은 작고 때까지 유언처럼 이어졌다.
47년 중좌 계급으로 하바로프스크 방송국 정치위원에 부임한 강 소좌는 54년 예편과 함께 모스크바로 건너가『소련여성』이란 잡지의 조선어부 주필로 59년까지 근무하다 62년 지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강 소좌 부인은 남편사후 이 잡지의 번역 원으로 30년 가까이 근무한 뒤 80년대 초 은퇴했다.
한편 김 회장 형제는 부친이 타계한 81년 기존의 회사를 (주)진도로 키웠다. 사업은 커져 갔고 소련은 사업상 절실한 나라가 됐다.
김 회장은 83년 소련에 진출했다. 그때부터 해마다 6백만∼7백만 달러 어치 가까이 의 모피를 수입해 사업을 키우면서 일방으로는 강 소좌 가족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7년여, 한-소 국교가 열리고 김 회장은 올 초 마침내 강 소좌를 찾아낼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연세대 최평길 교수(행정학과)가 연구 차 소련을 가끔 찾는다는 것을 알게 된 김 회장이 최 교수에게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강 소좌의 소식을 알아 달라고 당부했다.
최 교수는 올해 초 모스크바 방문 길에 동포사회의 원로인 박길룡씨(전 북한외교부 부 부장·현 소련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선임연구원)를 찾아가 김 회장 이야기를 했다.
박씨는 여러 경로를 타진한 끝에 드디어 강 소좌의 부인 루드밀라 이씨의 거처를 알아냈다.
김씨의 옛 선물을 고이 간직할 만큼 김씨를 잊은 적은 없으나 그건 까마득한 44년 전의 일이었다.
『도무지 믿기 질 않데요. 어찌 이런 일이 있겠소. 아버지가 받은 도움을 자식이 갚겠다고 10년 동안 날 찾았다니. 남편이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 싶어 눈물이 났습니다.』
헤어지던 해 김 회장의 어머니는 36세였고 이씨는 26세였다. 김성식씨와 강씨는 이제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김 회장은『은혜라는 걸 생각합니다. 주는 쪽은 무심할 수 있으나 받는 쪽은 그게 아닙니다. 우리 가족이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은 강 소좌 같은 분들의 도움 때문 아니겠습니까.』
『이놈이 강 소좌 부인을 잘 대접하나, 안 하나 지하에 계신 선친께서 눈을 부릅뜨고 보고계실 것』이라고 김 회장은 덧붙였다.
이씨는 내년에 다시 올 것을 기약하며 20일 모스크바로 간다. <이헌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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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