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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장|독립운동 정신기려 극일에 ″앞장〃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민족해방의 달」 8월을 맞을 때마다 새삼스레 떠올리게되는 화두다.
해방 46년, 이제 그 논쟁의 의미도 열기도 많이 퇴색했지만 그래도 매년 이맘때면 이 화두를 놓고 남다른 감개와 울분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국권침탈에 감연히 맞서 나라를 되찾는데 한몸을 희생한 순국유공자와 그 유족들의 모임인 광복회회원들이 바로 그들이다.
현재 서울여의도동17의23 광복회관 2층에 본회 사무실을 두고있는 광복회가 탄생한 것은 역사적인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뤄지기 직전인 65년2월27일.
광복직후 사회적 혼란과 6·25등 계속되는 시련속에 국가독립을 위해 희생한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국가적 보훈이 미뤄지고 있다가 5·16 군사혁명과 함께 62년3월1일 최초로 독립유공자 2백4명에게 건국훈장이 서훈되고 같은 해 4월16일 독립유공자 및 월남귀순자 특별원호법 제정으로 다음해 3·1절 날 7백44명에 대한 건국훈장 또는 대통령표창이 주어지면서수상자 본인 및 유족들간에 단체설립이 추진돼 2년 만에 빛을 보게된 젓이 광복회의 출발이다.
<초대에 이갑성씨>
기존 친목단체인 33인유가족회·순국선열유족회·독립동지회의 대표들이 정부 주선아래 한자리에 모여 『단체의 목적과 취지가 같아 통합한다」고 선언, 단체의 이름을 광복회라 부르기로 하고 초대회장에 33인중 생존자인 연당이갑성선생(1889∼1981·3·25)을 추대했다.
회장은 회원들의 대표로 상호간 친목도모와 복리증진을 위해 정부의 각종 정책결정에 독립유공자들의 의견을 제시하고 관련 기념행사 등에 대표자격으로 참석함은 물론 사회적 현안이 있을 때 성명발표와 반일데모 등 집단행동을 주도해 민족정기선양에 앞장서는 자리.
때문에 때때로 정부차원의 일일지라도 의견이 달라 정부로부터 미움을 사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고리타분한 옹고집」이란 비판을 받기도 한다.
특별히 생기는 것도 없이 꼬장꼬장한 목소리를 내는데서 붙여진 별호이기도 하다.
가뜩이나 노인들인데다 이같은 눈총 때문인지는 몰라도 발족부터 지금까지 26년간 회장이 열번이나 바뀌어 평균재임기간은 2년6개월.
초대 이회장은 대구출신 기독교신자로 세브란스병원사무원으로 있던 1919년 3월1일 당시 31세의 나이로 독립선언민족대표 중 한명으로 참가, 일본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6개월의 옥고를 치른 인물.
이회장은 해방 후 여러 정당·사회단체의 고문을 맡았고 전쟁중인 52년10월 전시내각의 국무총리로 지명되기도 했었다.
62년 서훈당시 2등급인 대통령장을 받은 이회장은 광복회창설과 함께 서울을지로2가165에 사무실을 두고 사단법인 간판을 내걸었다.
이회장은 당시 한일회담을 둘러싸고 독립유공자에 대한사회여론이 환기되는 분위기 속에서 기업체·유지들로부터 찬조를 받아가며 무일푼의 광복회를 꾸려나갔다.
당시에도 총무·의전·사업·문화부 등 부서에 임직원 10여명이 있었으나 정부로부터 한푼의 지원도 받지 못해 직원월급도 주지 못했지만 이회장의 지면덕분에 「반구걸 반찬조」로 돈을 얻어 한달여 후인 4월8일 사무실을 을지로2가199 부근 건물로 옮기고 그해 8월21일에는 부산지구연합지회(경남·제주)와 경북지회를 개설하기도 했다.
이회장은 이어 67년2월17일 충청도지회와 전라도지회를 개설하며 회원확충에 노력했는데 그해 광복절에 회원 10여명이 한일국교정상화에 불만을 품고 일본대사관에 난입, 일장기를 찢어버리는 바람에 나중에 김종비국무총리가 공식 사과하는 외교적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회원들은 일제의 침략에 대한 일본의 공식사과와 적절한 보상 등을 요구하며 정부에 대해서는 굴욕적인 외교철폐를 주장, 국민들로부터 큰 반향을 얻었다.
68년 3·1절에는 다시 독립유공자 4백2명에게 건국훈장 및 대통령표창이 시상됐으며 같은 해 7월10일 독립유공자사업기금법이 시행됨에 따라 그동안 제외됐던 대통령표창수상자와 그 유족 중 생계부조금을 받는 수권자전원이 회원으로 가입됐다.
그러나 이 사업기금은 63년 순국선열 유족회회원 13명의 국회청원에 따라 대일 청구권자금 중 10억원이 생계부조비로 할당된 것으로 당시 회원들은 『정부에서 가로채 생색만 낸다』며 크게 반발, 정부에서 추가로 10억원을 출연하기도 했다.
독립유공자사업기금은 그동안 이자를 합쳐 현재 30억원 규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회장은 69년5월22일 경기도지회개설과 함께 8월8일 본회사무실을 주자동42의2로 이전한 것을 끝으로 그 해 9월20일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李회장은 이 같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암본정일이란 창씨개명 등 친일행적 폭로로 시달리다 81년3월25일 92세를 일기로 운명해 국민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친일행적으로 곤욕>
이회장 퇴임 후 회원간의 불화로 1년 동안이나 공석이던 광복회장자리는 70년9월20일 의열단출신의 이화익선생(1900∼78·3·2)이 2대회장에 취임함으로써 이어지게 됐다.
이회장은 황해도장연출신으로 의열단에 가입, 26년12월 동양척식주식회사 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한 나석주의사 의거의 공모자로 징역15년을 선고받고 29세의 나이로 서울마포형무소에서 14년간 복역, 63년 국민장수훈유공자로 광복 후 감찰위원회 감찰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회장은 4개월 여만에 사퇴, 71년2월13일 제3대회장에 호일 조시원선생(1904∼87·7·18)이 취임했다.
임시의정원의원·광복군총사령부부관 등을 역임한 조회장은 72년4월15일 본회사무실을 서울안국동175의85로 이전하고 타고난 친화력을 바탕으로 그동안 다소 삐거덕거리던 회원간 화합을 도모하는데 주력했다.
조회장은 재임중인 73년3월3일 원호대상자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제2564호) 개정으로 광복회가 사단법인에서 공법인으로 바뀜에 따라 국가로부터 월급과 행정비를 지원받는 최초의 회장이 됐다.
제4대 회장은 광복군 제2지대 1구대장 출신으로 현재독립기념관 관장인 안춘생장군(80)이 맡아 3년간 활약했으며 제5대 회장에는 박은식선생의 양아들로 광복군 상해지대장출신의 박시창장군(1903∼86·6·7)이 취임했으나 병환으로 1년만인 77년5월19일 사임함으로써 단명으로 끝났다.
광복회의 중흥(?)을 이룩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77년5월20일 제6대 회장에 취임한 일서 김홍일장군(1898∼1980·8·8).
평북용천출신으로 황해도 경신학교교사로 재직중 학생비밀결사사건으로 상해로 망명, 중국군에서 활약하다 44년 광복군총사령부 참모장으로 한미합작 국내상륙작전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은 김장군은 48년 귀국 후 육사교장·육군제1군단장등을 역임하고 육군중장으로 예편한뒤 외무장관·신민당 당수등을 두루 거친 한국현대사의 큰 인물.
김회장은 취임하자마자 혁명반대와 야당 당수로 불편한 관계에 있던 당시 박정희대통령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 박대통령으로부터 회관건립지원금 5억원을 받아냈다.
당시 박대통령은 정치적으로 불편한 관계이면서도 군선배로서 김회장의 고매한 인품을 존경하고 있던 터라 김회장의 지원요청을 받자마자 5억원을 선뜻 내주면서 당시 4억4천만원에 여의도흥국생명건물에 세들어 있던 원호처를 옮기게 해 지원금과 함께 전세금을 이용, 현재의 광복회관 공사비로 충당케 배려했다.
김회장은 공사비를 아끼기 위해 양회협회와 철강협회등으로부터 시멘트와 철근을 무상으로 협조받기도 했다. 78년5월31일 신축된 지하1층·지상8층짜리 광복회관으로 사무실을 옮기고 같은 해 11월28일 회관준공식을 가짐으로써 13년여 동안 떠돌이 살림에 지친 광복회의 내 집 마련 꿈을 이룩했다.
김회장은 이같은 업적으로 회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79년6월28일 제7대회장으로 재추대 돼 80년1월 부산지구 연합지회에서 경남지역을 분리, 경남도지회와 전라도지회로 통합돼있던 것을 전남·전북도지회로 분리·증설하는등 활약하다 80년8월8일 8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해 광복절에는 독립유공자 4백7명이 새로 건국훈장·건국포장 및 대통령표창을 추서 또는 포상받았다.
김회장은 5공주체 세력의 본거지인 대구출신인데다 국내 활동 경력등의 이유로 취임직후한때 자격시비가 일기도 했으나 84년9월3일까지만4년간 재임함으로써 초대 이갑성회장(4년5개월)을 제하고는 최장수를 기록했다.
<자격시비 일기도>
제9대회장은 의열단출신 유석현선생(1900∼87·8·28)이 맡아 3년간 이끌었는데 재임기간중 조직확대에 주력.
85년11월 경기·인천연합지회 회관을 건립하고 이듬해 인천지회를 분리하는가하면 충북도지회와 광주지회를 각각 분리·증설하는등 애쓰다 88년8월28일 점심식사후 회장실에서 집무중 갑자기 쓰러져 운명, 순직했다.
유회장의 갑작스런 별세로 부회장이던 송지영직무대행이 9개월간 맡던 광복회장자리는 88년6월1일 현회장인 청뢰 이강훈선생(88)이 보선회장으로 취임, 3개월간 일하다 88년9월4일 제10대회장으로 재추대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회장은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연맹을 개편한 남화 한인청년연맹에 가담, 33년11월 구파 백정기의사와 함께 일제의 주중공사 유길명을 폭살하려다 잡혀 징역15년을 선고받고 45년10월10일 출옥한 한때 독립운동사집필을 담당했을 정도로 학식과 행동을 겸비한 인물.
이회장은 88년 보선회장 취임과 더불어 회원들의 복지증진에 노력, 그해 상훈법에 묶여 혜택을 못보는 해방전 순직유공자 증손까지 학비감면등 혜택을 주도록하는 것을 골자로 한 단독법안을 마련해 국회등에 청원하는가 하면 보훈처리로부터 매년 1억원을 지원받아 대학생 50만원, 고교생 25만원, 중학생 10만원등 1백63명에 대한 학비지원사업을 펴오고 있다.
이회장은 또 옛 일본군사령부 자리인 용산미군기지터에 부지 3천평을 마련, 기념관과 전시장까지 갖춘 5층짜리 독립회관 건립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만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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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