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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3)|<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 (38)|이춘상|일군 통역 노릇

1939년에서 40년 말까지의 기간은 만주 최후의 항일 저항군이었던 동북연군 총사령 양정우도 이미 전사한 뒤였다.

40년4월 제1부사령 위극민이 코민테른 중공 대표 위원회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그들은 30년대 말에 이르러 궤멸 상태에 빠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경찰 추적 피해 호랑이 소굴로 뛰어든 것|쓰라린 과거 되새기며 한숨

대부분의 간부들이 전사·부상·반란·이탈·투항 등으로 사실상 소멸되고 만 것이다. 그중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 우리가 알 수 있는 몇몇이 있다.

제1로 군에 김일성 (제2군 6사장·제2군장), 제2로 군에 최석천 (본명 최용건·제7군장·정치 주임), 제3로 군에 김책 (제3군 제4사·정치 주임) 등 후일 6·25동란시 북의 주역들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수리강을 지나 시베리아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러니 김일성은 우수리강을 넘어가기 전 동생 김영주를 보자고 불렀던 것이다. 아무리 혁명가라 할지라도 인간의 혈육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김영주가 겪었던 고난에 찬 어린 시절은 당시 가엾은 우리 조국의 모습 바로 그대로였다. 나는 그의 회고담에 무한한 그 무엇을 느꼈다.

『김 동지, 참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토록 고생하고 계실 때 나는 서울에서 학교에나 다니고 있었으니 부끄럽고 염치없습니다.』

『천만에요. 이 동지는 용감히 일본군을 뛰쳐나와 할 일을 다 하신 것 아닙네까. 나처럼 일본군 통역이나 하던 자는 정말 면목없디요. 그런데 이 동지, 오늘은 왜 그 말씀을 안하십네까.』

그는 여지껏 보지 못했던 진지한 표정과 떨리는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무슨 말씀 말입니까.』

『나에게 왜 통역 노릇을 했느냐고 했던 그 질문 말입네다. 나는 그간 이 동지의 그 질문이 제일 괴로웠습네다. 그 괴로움은 물론 내 양심의 가책입네다. 이 동지께서 이해해 주시든 말든 언젠가는 꼭 이야기할 참이었어요.』

『김 동지, 그 질문을 나도 무척 후회하고 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 그 이야기는 잊읍시다.』

『동지의 마음을 나도 알디요. 그러나 이 동지는 지금도 내가 왜 통역을 했는지 궁금하실 겁네다. 말이 나온 김에 털어놔야 나도 속이 시원하겠습네다.』

일본 통역을 했던 거북한 그의 입장을 말리려 했으나 그는 벌써 이야기하기로 작정한 사람이었다.

『나는 소-만 국경 밀영에서 마지막으로 형님과 헤어진 후 오늘날까지 정처 없는 떠돌이였습네다. 만주 땅이라면 안 가본 데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노동 일도 안해 본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뭣이든 했디요. 접시닦이, 요리집 종업원, 댄스홀·바의 심부름꾼은 물론이고 딱도 팠고 석탄도 캤디요. 그런데 경찰이나 특무들은 어떻게 냄새를 맡는지 내가 새로운 장소로 도망치면 4∼5일 후에는 반드시 찾아오는 겁네다.

쫓겨다니기가 참 지긋지긋했어요. 놈들은 나를 체포해 조건부로 형님과 흥정하려고 했거든요. 그래서 나는 더욱 죽어라고 도망쳐다녔디요. 그러나 끝내는….』

『끝내는 어떻게 하셨나요.』

『호랑이 소굴로 뛰어들었디요.』 『호랑이 소굴이라니요.』

『일본군 말입네다. 일본군에 숨어 있는 것이 제일 안전했으니까요.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지 않습네까.』

그는 무엇인가를 호소하듯 자기 말을 믿어달라고 애원하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여지껏 누구에게도 내 신상에 관해 이야기해 본 일이 없습네다. 그러나 중국군에 와서 이 동지와 생활하다 보니 어쩐지 이 동지에게 만은 한번 이야기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디요. 그래서 이렇게 얘기가 길어졌습네다.』

이야기를 끝낸 그는 쓰라린 과거를 되새기듯 한숨짓기도 했다. 나는 그를 위로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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