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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변장호 주간지 읽고 감동『눈물의…』제작

변장호(1939년생)는 74년부터 5년간 감독협회 회장 노릇을 했고 3년간 영협 이사장 노릇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일생의 실수였다. 후회스럽기 짝이 없다. 감독으로서 가장 일할 수 있는 나이에 감독은 안하고 딴 짓을 하며 엄벙덤벙 지냈기 때문이다. 현 감독 협회장 김호선, 그와 경합했던 이장호를 만났을 때 왜 감독은 안하고 그런 것 하느냐고 말해 줬다.
그는 지금까지 80여 편 연출했는데 그중『홍살문』(72년), 『을화』(79년),『감자』(87년)가 대표작 2백선 중에 들어 있다. 이밖에『여자가 화장을 지울 때』(70년),『비련의 벙어리 삼룡』(73년),『망나니』(74년),『보통여자』(76년),『사랑 그리고 이별』(83년),『푸른 하늘 은하수』(84년)등으로는 대종상·청룡상·백상상·아시아 영화제 등의 감독 상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상을 탔다.
흥행이 잘된 것으로는『미워도 다시 한번 82』(82년)가 명보극장에서 38만 명 들었니『0양의 아파트』(78년)가 국도극장에서 35만 명 들었다.『눈물의 웨딩드레스』(73년)는 20만 명이 들었다.
『눈물 웨딩드레스』는 그가 직접 제작·감독했던 영화다. 그 당시 몸이 아파 입원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본 주간지에 창부와 공과 대학생의 애달픈 하랑의 얘기가 게재되어 있었다. 느껴지는 바가 있어 작가 신봉승에게 의뢰해 취재·집필케 했다. 이 영화의 흥행 성공이 그가 86년에 설립, 경영하고 있는 영화사 대종필름의 기반이 되고 있다. 충무로에 3층 짜리 건물이 있는 것이다.
변장호가 영화계에 투신하게 된 계기는 61년 제대하고 멍하니 있을 때 신상옥이 조감독을 모집하는데 응시한 것이었다. 15명 뽑는데 2천명이 모였다.
6개월 훈련 후 15명중 다시 5명을 뽑겠다고 했는데 결국 남은 것은 4명뿐이었다. 유능한 사람일수록 좋은 직장을 구해 빠져나가고 갈데 없는 사람만 4명이 남았던 것이다. 동기 중에는 미국으로 가 버린 이경태가 있다.
그는『도시의 사냥꾼』(79년),『불새』(80년)등 8편을 감독했다.
그러나 3년 후 신상옥이 부도가 나 다시 갈 데가 없어졌다. 이때 변장호는 한양대 영화과에 편입한다. 그는 당초 광산공학과를 다니다 3학년 때 입대했다. 기왕 영화를 시작했으니 좀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영화과에는 배우 김승호가 청강생으로 나와 같이 다녔다. 그 당시 김승호는 풀이 죽어 있었다. 4·19때 자유당 정부에 아첨(?)했다고 대학생들에게 집안에서 끌려 나오는 등 당했었기 때문이다. 그후 김승호는 다시 활동을 재개, 제작에도 손을 대나 별로 재미를 못보고 실의 속에 타계한다.
그러고 보면 한국에선 배우가 제작해 성공한 경우는 드문 것 같다. 허장강·장동휘·김희갑·최무룡·윤일봉·신영균이 다 제작에 손대 재미를 본 경우는 아닌 것 같다. 유일하게 김지미가 성공한 경우라고 할까.
영화과에서 다시 공부하고 나온 변장호는 전응주(작품 10여 편)·김대희(작품 6편)등 외 조감독을 거쳐 4년만에『태양은 내 것이다』(67년)로 데뷔했다. 이것은 그 당시 잘 날리던 추식 원작·김하림 각본으로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여러 경향의 작품을 손대 왔는데 그중 상업성이 강한 멜로 드라마가 많아 보이는 것은 그런 것을 해야 제작자가 붙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는 정말 하고 싶은 작품만을 할 생각이다. 남는 것이란 좋은 작품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고영남·남기남·이혁수 등 감독에게 연출 의뢰하고, 또 자신이 연출해 직접 제작한 작품이 5∼6편 되지만 아직은 제작비를 마음놓고 쓰며 전력투구, 제작하기엔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경제력이 약하다.
외화 수입만 해도 7억∼8억 원 짜리 비싼 영화를 들여 봤다가 흥행이 안될 경우 단 한방에 갈 우려가 있어 몸조심하고 있는 형편이다.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기 위해선 은인 자중하며 기다릴 수밖에 딴 방법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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